“데이터 보호주의가 인터넷 가치 훼손… 규제보다 기술로 해결해야”
오늘날 인터넷의 모태는 1969년 탄생한 ‘아르파넷(ARPANET)’이다. 냉전 시대 미국 국방부가 군사용으로 설계했다. 아르파넷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서로 다른 네트워크에 속해 있는 사용자끼리 데이터를 주고받기 어려웠던 것. 이를 해결한 인물이 빈트 서프(Vint Cerf) 박사다. 1973년 로버트 칸 박사와 함께 ‘TCP/IP’라는 통신 규약을 만들어 전 세계 모든 네트워크가 소통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여러 개의 네트워크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하나의 통합된 네트워크, 지금의 인터넷이 탄생했다. 그가 ‘인터넷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다. 당시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 컴퓨터 과학계의 노벨상 ‘튜링상’ 도 받았다.
서프 박사는 2005년부터 구글에서 ‘수석 인터넷 전도사(Chief Internet Evangelist)’ 로 활동하고 있다. 인터넷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인프라 투자를 활성화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국제전기통신연합(ITU)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전 세계 인구의 67%만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럽과 미주 등에선 인구의 90%가 인터넷을 사용하지만, 아프리카의 인터넷 사용 인구는 37%에 불과하다. 그래서 서프 박사는 인프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인구의 97%가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한국이 좋은 사례라고 한다. 마침, 올해는 구글이 한국에 진출한 지 20주년이 된 해이기도 하다.
최근 이메일을 통해 서프 박사와 인터뷰했다. 인터넷의 부작용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데이터 보호주의와 인공지능(AI)의 위험성이 커지는 지금 상황에 대해 인터넷 아버지의 고견을 물었다. 1943년생으로 올해 여든하나의 나이지만, 지금도 현역으로 뛰고 있는 그의 일에 대한 생각도 들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여든이 넘은 나이인데도 구글에서 현역으로 일하고 있다. 비결이 있나.
“호기심이다. 나는 호기심이 많고, 어려서부터 질문을 좋아했다. 다행히 많은 동료가 기꺼이 자기 지식과 문제를 나와 공유해 줬다. 나 같은 엔지니어는 문제 해결을 통해 성장한다. 구글에선 새로운 문제와 해결책을 접할 기회도 많았다. 내가 호기심을 유지하고 번성하게 한 활력소였다. 최근 내 나이가 10진수로는 80세가 됐지만, 16진수로는 아직 50세다. 적어도 내 마음은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
구글에서 수석 인터넷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다. 전 세계 유일무이한 직함을 어떻게 얻게 됐나.
“2005년 구글에 입사했을 때였다. 구글 공동 창업자인 래리 페이지, 세르게이 브린, 에릭 슈밋이 내게 원하는 직함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대공(archduke·군주 혹은 귀족의 작위 중 하나)!’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들은 자리를 떴다가 돌아와 마지막 대공은 1914년에 암살된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였으며 당시 그의 죽음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고 전했다. 대신 구글의 수석 인터넷 전도사란 직함은 어떻겠냐고 제안해,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더 많은 사람이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도록 돕는 게 내 역할이다.”
구글에서 장애인을 위한 접근성 정책의 초석을 마련한 인물도 당신이었다고.
“나는 구글에서의 첫날부터 청각, 시각 또는 이동에 문제가 있는 사람도 구글 제품을 사용할 수 있도록 열정을 쏟았다. 사실 나는 13세부터 보청기를 착용해 왔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다. 나도 유튜브와 구글 미트(화상 회의)를 비롯해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에서 음성을 자막으로 전환해 주는 캡션 기능을 많이 사용한다. 구글이 장애인을 위한 제품 접근성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독려하고 있다.”
인터넷 전도사가 보기에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인터넷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시대가 올까.
“물론이다. 이제는 저궤도 위성 등장으로 지구상의 거의 모든 곳에서 인터넷 접속이 가능해졌다. 와이파이를 비롯해 5세대(5G)·6세대(6G) 이동통신 서비스까지 더해지면서 ‘유비쿼터스 액세스(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환경)’가 더 확대될 것이다. 다만 인터넷 접속이 전부가 아니란 점을 강조하고 싶다. 유일한 장애물은 인터넷에 접근하기 위해 드는 비용과 인프라의 지속 가능성이다. 여기에 인터넷의 용도, 위험성 그리고 그에 대한 대응책을 이해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한국은 인구의 97%가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좋은 사례다.”
인터넷 접근을 확대하는 건 좋은데, 인터넷의 위험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일례로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마리아 레사는 2021년 소셜미디어(SNS)가 가짜 뉴스를 양산하고 있다며 인터넷의 부작용을 지적했다.
“레사가 인터넷 등의 부정적 남용에 대해 우려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인터넷 부작용은 주로 강력한 기술을 나쁜 목적으로, 고의로 사용하는 사람이 초래한다고 본다. 잘못된 행동을 한 당사자에게 어떻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의도적으로 기술을 악용하고 해로운 결과를 초래하는 개인, 단체 심지어 국가에 대한 대응도 포함된다.”
물론 인터넷의 긍정적인 면도 많다.
“그렇다. 인터넷과 월드와이드웹(WWW·이하 웹)은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놀랍도록 가치 있는 프로그램이나 온라인 서비스를 일상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인터넷이 없었다면 다른 방법으로는 발견할 수 없었던 정보에 인류가 접근할 수 있게 됐고, 인터넷을 통해 방대한 데이터가 포함된 어려운 문제도 해결하게 됐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지식을 널리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게 된 점도 내가 좋아하는 인터넷의 긍정적인 사례다.”
인터넷이 인류 번영에 직접 도움을 준 사례도 있나.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당시 온라인으로 많은 사람이 협력해 새로운 백신과 치료법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인터넷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비즈니스도 여럿 탄생했다. 또 인터넷 덕분에 많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글로벌 시장에 진출할 수 있게 됐다. 전자상거래(이커머스)를 통해 글로벌 시장에 접근하게 된 많은 국가도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최근 개별 국가의 데이터 주권에 대한 중요성이 커지면서 데이터 보호주의 바람이 불고 있다. 국경 간 데이터 교류 장벽이 높아지는 현 상황을 어떻게 평가하나.
“인터넷엔 핵심 전제가 있다. 바로 네트워크상 모든 디바이스가 상호작용하고, 데이터가 국가 간 경계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핵심 전제가 무너진다면 진정한 인터넷의 가치가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자칫 전 세계를 오가는 이메일과 웹 애플리케이션 작동이 멈추는 결과까지 초래할 수 있다.”
정보 교류 장벽을 낮출 방법이 있을까.
“물론 국가, 기업, 소비자 입장에선 누군가 허락 없이 특정 정보에 접근하는 것이 걱정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해결하자고 데이터 흐름을 막아서는 안 된다. 대신 암호화 기술을 통해 데이터 접근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데이터를 어디에 보관하더라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다면, 시스템 안전성이 높아지고 네트워크나 데이터센터에 문제가 생겨도 데이터를 지킬 수 있다.”
결국 기술이 데이터 보호주의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뜻으로 들린다.
“맞다. 나는 기술을 활용해 책임감 있는 정보 공유를 촉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러한 환경에서 허가받은 사람만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호 장치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 물론 공공 정보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국경을 넘나드는 데이터 흐름이 전자상거래, 첨단 연구, 글로벌 정보 교환, 협업 등 수많은 유익한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서프 박사는 AI 개발과 사용에 신중할 것을 당부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지난해 한 AI 챗봇에 자신에 관해 써보라고 지시했는데, 잘못된 사실을 진짜처럼 답변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경악했다고 한다. 같은 해 실리콘밸리에서 열린 한 콘퍼런스에서 그가 “(AI 챗봇이) 항상 제대로 작동하는 게 아닌데도 멋지다(cool)는 이유만으로 투자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 배경이다. 그의 경고는 인터넷의 아버지가 한 발언이라 더 주목받았다.
만약 인터넷이 없었다면, AI도 등장하지 못 했을까.
“다소 과장된 표현이다. AI 연구는 인터넷이 등장하기 훨씬 전인 1960년대에 시작됐다. 다만 방대한 양의 텍스트, 이미지, 소리 데이터를 모아 대규모 멀티 모달 모델(LMM)을 훈련할 수 있게 된 것은 인터넷과 웹 덕분이 맞다.”
구글에서 AI 모델이 탄생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을 것 같다. 기분이 어땠나.
“사실 구글에서 동료들이 방대한 정보를 활용해 통계적 모델의 훈련을 수행하는 모습을 봤지만, 당시엔 머신러닝의 잠재력를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특히 언어 인식과 번역 같은 분야에서 머신러닝이 얼마나 혁신적인 변화를 불러왔는지를 확인하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럼에도 당신은 ‘AI가 항상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AI가 제대로 작동할 때는 정말 놀라운 결과를 보여준다. 실제로 우리는 AI를 통해 새로운 질병 치료법을 찾거나 데이터센터를 더 효율적으로 냉각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구글에선 자율주행차 사업인 ‘웨이모’에서 AI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제는 AI가 때때로 놀라울 정도로 잘못된 결과물을 내놓는다는 사실이다. 바로 ‘환각(hallucination)’ 현상이다. 이 때문에 의료나 치료 영역에서 AI를 사용한다면, 그 위험성을 인식해야 하며 AI를 안전하게 개발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만약 더 위험한 용도로 AI를 사용한다면, 반드시 사용자 안전을 보호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장치가 필요하다. AI라는 새로운 기술을 사용할 때 따라오는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앞으로 우리가 AI를 안전하게 개발하고 사용하려면.
“개발자와 사용자 모두가 AI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구글에서는 AI 기술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을 줄이기 위해 AI 개발과 사용과 관련된 엄격한 지침을 마련해 두고 있다. 사용자의 경우 AI를 다룰 때 비판적인 사고를 발휘해야 한다. AI가 내놓는 결과물의 출처와 주장을 확인하고 검증하는 게 일종의 관행이 돼야 한다. 아울러 AI를 더 안전하게 사용하기 위한 공동체 노력도 필요하다. 구글의 ‘보안 프레임워크(Secure AI Framework)’가 대표적이다.”
마지막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기술이 쏟아지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실제로 우리는 새로운 소프트웨어가 매일탄생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다음 세대뿐 아니라 모든 세대가 디지털 기술이 악용될 경우 마주할 잠재적인 위험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온라인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과 도구를 마련해야 한다. 만약 누군가 당신인 척하고 당신 계정과 정보를 도용하려 한다면, 이를 막을 수 있는 2단계 로그인 인증이 필요할 것이다. 아울러 나는 모든 사람이 프로그래밍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관련 종사자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우리 모두가 큰 문제를 작은 문제로 분해하고, 해결책을 찾고, 이를 하나의 솔루션으로 통합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Plus Point
싸이월드 사태 예견한 서프 박사? “21세기, 디지털 암흑 시대 될지도”
2019년 10월 한국 토종 소셜미디어(SNS) 싸이월드가 경영난으로 운영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싸이월드에는 서비스가 시작된 1999년부터 회원 약 3200만 명이 올린 사진 180억 장과 동영상 1억5000만 개가 저장돼 있었다. 만약 싸이월드가 폐업하면 모든 정보도 함께 사라질 위기에 처해질 수 있었다. 당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싸이월드 사진을 백업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청원까지 올라온 이유다. 2021년 싸이월드제트란 신규 운영사가 싸이월드를 인수하면서 잠시 정상화됐으나 이마저도 현재 서비스가 중단돼 접속이 불가능한 상태다.
서프 박사는 오래전부터 이 같은 ‘싸이월드 사태’ 를 예견해 왔다. 디지털 데이터를 장기간 보존할 수 있는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21세기가 ‘디지털 암흑의 시대’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던 것이다. 그는 “오래된 3.5인치 플로피 디스크에 저장된 정보를 읽기 위해 ‘이베이’에서 디스크 리더기를 구매했는데, 플로피 디스크에 저장된 프로그램을 읽을 소프트웨어가 없다면 리더기가 있어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만약 우리가 오래된 디지털 정보를 제대로 저장하고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지금 시대가 기록되지 않는 디지털 암흑 시대에 접어들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프 박사는 구글에서 ‘디지털 벨룸(Digital Vellum·디지털 양피지)’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다. 운영체제나 소프트웨어에 상관없이 모든 디지털 데이터를 안전하게 저장하고 읽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이 프로젝트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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