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를 찾아서] 35년간 공장 찾아 직업병 밝힌 의사… “치료보다 예방이 먼저”
직업병의 인관관계 풀어 근로자 권리 찾아
평소 컴퓨터를 많이 쓰는 근로자는 눈이 침침하거나 목, 어깨, 허리가 자주 쑤신다. 밤샘 근무를 자주 하는 야간 근로자는 식습관이 불규칙해 비만이나 당뇨병이 많다. 대기 오염물질이 많은 곳에서 일하는 근로자는 폐 질환에 걸릴 위험이 크다. 각 직업마다 갖고 있는 직업병이 있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수많은 근로자가 일하는 환경이나 일 때문에 병이 생겼다는 것을 몰랐다. 물론 산업재해(산재)를 인정받는 일도 드물었다.
지난 6일 인천 남동구 길병원에서 만난 강성규 가천대 길병원 보건대학원장(직업환경의학과 교수)은 “내가 연구하고 환자를 돌보는 직업환경의학은 근로자가 직업병을 예방하고, 정당한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게 돕는 학문”이라고 말했다.
강 교수는 1989년부터 35년간 한국 산업보건의 기초가 되는 제도와 정책에 기여해왔다. 안전보건공단에서 오랜 기간 근무하면서 초창기 국내 직업환경의학을 이끌었고, 수많은 직업병을 찾아 근로자의 권리를 찾고 발병 원인을 없애는 데 주력했다.
가천대 길병원으로 옮긴 뒤에도 인천 기계제조공장에서 카드뮴 중독, 사격장에서 납 중독, 세척공장에서 중추신경계질환, 도금공장에서 시안 중독을 최초로 발견해 보고한 사람도 강 교수다. 그 계기로 고용노동부가 전국적인 조사를 시작했고, 전국에 직업병안심센터가 설립됐다.
그는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아 지난달 19일 ‘2024년도 산업재해예방유공 포상’에서 근정포장을 받았다. 또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국제산업보건학회(ICOH) 회장을 맡아 국제산업보건안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다음은 강성규 교수와의 일문일답.
–직업환경의학은 어떤 분야인가.
“이름 그대로 직업과 환경 때문에 건강에 문제가 생긴 환자를 보는 분야다. 임상의학은 환자를 진단해 치료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라면, 직업환경의학은 예방이 목표다. 병의 원인을 환경에서 찾아 원인을 없애는 것이다. 가령 과거에는 벤젠을 많이 썼는데, 이 물질이 백혈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사용이 금지됐다.”
–예전에는 산업의학이라고 불렸는데.
“맞는다. 세계가 직업병 문제에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된 시기가 산업혁명 때다. 중세시대에는 대개 노예나 죄수들이 노동을 했기 때문에 그들이 건강이나 복지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산업혁명 이후 석탄과 납, 수은 등 새로운 화학물질을 사용하면서 독특한 질병들이 생겼다.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은 폐가 나쁘고 납을 많이 쓰는 사람은 복통을 자주 겪는 식이었다. 이탈리아의 의사 베나르디노 라마치니는 1700년 이런 사례를 모아 ‘직업인의 질병’이라는 책을 냈다. 노동자의 질병은 직업 때문에 발생한다는 내용이다. 이것이 산업의학, 즉 직업환경의학이 시작된 계기다.”
–직업병이라는 게 진짜로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병이 생기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같이 외부 병원체에 감염되는 질환이나, 노화와 나쁜 생활 습관으로 생기는 고혈압·당뇨병 같은 만성질환도 있다. 그런데 일터의 환경, 즉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요인으로부터 생기는 직업병도 있다.
더운 곳에서 줄곧 일하면 열사병이 생길 수 있고 소음이 심한 곳에서 일하면 난청이 생길 수 있다. 납이나 수은, 카드뮴, 크롬 등 중금속을 사용하는 일을 하다 보면 이 물질들이 몸속에 들어와 병을 일으키기도 한다.
눈으로 보이는 요인뿐 아니라 업무 환경에 의해서도 질병이 생긴다. 일반 사무직들이 컴퓨터를 자주 사용하거나 오래 앉아 있음으로써 고혈압이나 당뇨병이 잘 생기고, 야간 근무자에게 심혈관질환이 잘 생기는데 이것도 직업병이라 볼 수 있다.”
–가정의학과 전문의였는데, 직업환경의학을 한 계기는.
“의대생 때 의사나 의료기관이 없는 무의촌으로 봉사활동을 자주 나갔는데, 그때 다양한 과의 전문의 선배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각 과마다 고칠 수 있는 부위가 달랐고 그것이 기계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가정의학과는 신체를 전반적으로 두루 살펴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환자를 신체 부위가 아니라 인간 전체로 보고 접근하는 것이 좋았다.
이후 주임 교수님이 권유해서 직업환경의학을 알게 됐다. 직업 환경에서 생길 수 있는 병의 원인을 찾아 해결해준다는 점이 참 매력적이었다. 1989년부터 당시 근로복지공사 부설 직업병연구소에서 본격적인 연구활동을 시작했다.”
–국내 최초로 석면 피해를 입증했다고 들었다.
“석면은 보온과 내구성이 뛰어나고 값이 싸 과거에는 보온재, 방화재나 건설자재 등에 널리 쓰였다. 그러다가 석면 가루가 늑막암, 폐암 등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현재는 1군 발암물질로 지정됐다. 사용이 금지됐다. 과거에는 석면의 위험성을 잘 몰랐다. 1969년부터 경남 양산에서 가동된 제일화학은 국내 최초 석면 방직 공장이었다. 당시 석면이 위험한 줄 몰라 석면가루가 날아다니는 환경에서 근로자들이 일을 했다. 폐암이나 악성중피종, 석면폐증을 앓다가 숨진 사람이 많았다.
1993년 이 공장에서 일하다가 악성중피종으로 숨진 근로자 사례를 조사해 국내 최초로 석면에 의한 직업성 암을 입증했다. 당시 환자를 치료했던 의사로부터 환자의 폐 조직 일부를 받았다. 국내에는 장비가 없어서 일본에 분석을 의뢰해 석면을 검출했다. 즉 석면이 병을 일으킨 원인임을 밝혀낸 것이다.”
–벤젠이나 시너가 직업병을 일으킨다는 사실도 밝혔다.
“1998년에는 광주 타이어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에게 백혈병의 일종인 골수이형성증후군이라는 혈액암이 발생했다. 3교대로 이뤄지는 24시간 동안 현장에서 작업환경을 측정해 벤젠을 찾아냈다. 국내 최초의 직업성 백혈병이었다. 이후 타이어공장에서는 벤젠을 제거한 시너를 사용하는 계기가 됐다.
경기도 시흥의 한 신발공장에서는 뇌손상을 입은 환자가 발생했다. 시너의 유기용제가 원인임을 밝혀 치료와 보상을 받을 수 있게 했다. 인조피혁 제조사업장에서 독성간염이 발생하고 사망하는 사례가 있었다. 이를 계기로 이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근로자들은 추가 건강검진을 받는 제도를 마련했다.”
–일을 하면서 느끼는 보람이 크겠다.
“1990년대만 해도 근로자는 물론 사업주도 근로 환경과 직업 때문에 특정 병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잘 몰랐다. 그래서 내가 전국의 공장들을 조사하면서 국내 최초로 입증한 직업병이 여럿 있었던 것이다. 당시 먹고살기 바빴기 때문에 자기 권리를 모르는 채 일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충격 받았다. 그래서 내가 가진 지식을 이용해 자기 권리를 모르는 근로자가 권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이 억울하지 않게 직업병을 입증하고 추가 발병을 예방하면서 보람을 느꼈다.”
–직업병을 줄이려면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할까.
“현재 우리나라 산재보상제도는 세계적으로 우수하게 안정적으로 정착돼 있다. 그런데 이는 직업병으로 인정될 때 해당한다. 현재의 많은 질병은 직업관련성이 모호하다. 일반 질병이 생기더라도 생활안정성이 필요하다. 근로자가 질병이 생겨 일을 할 수 없어도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보장시스템이 필요하다. 이를 상병수당이라고 한다. 상병수당까지 갖춰야 진정한 선진국이다.
직업병은 예방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근로자에 대해 건강검진을 실시하는데, 현재는 외부 요인 중심의 부분적 접근이다. 이를 사람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 모든 근로자는 자기 직업이나 일터 환경과 건강 상태를 놓고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직업환경의학과 의사와 상담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과 비용이 보전돼야 한다.
가령 혈당 수치가 높으니 당뇨병이라고 진단받는 것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일 자체가 당뇨병을 유발하는 환경이라면 그것을 찾아내 회사에 변화를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유럽 선진국은 이러한 제도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제도를 갖춘다면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는 현재(약 800명)보다 더 많이 필요할 것이다.”
참고 자료
대한내과학회지(1995), https://www.ekjm.org/upload/42803799.pdf
대한산업의학회지(1992), https://oldkmbase.medric.or.kr/KMID/035851992004001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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