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와인] ‘추석,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크로닉 셀라 스프리츠 앤 기글스

고려 후기 문인 서하(西河) 임춘이 지은 국순전(麴醇傳)을 보면 술(酒)이 말을 한다.

국순에서 국(麴)은 누룩, 순(醇)은 물을 타지 않은 걸쭉한 술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국순은 ‘도량이 크고 넓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존재’로 나온다.

“신이 주를 따르는 것은
그가 성인(聖人)의 덕이 있삽기에
수시로 그 덕을 마시었습니다.”


임춘, 국순전(麴醇傳)

임춘은 가전체 문학의 거두다. 술을 주인공으로 한 국순전 외에도 돈(傳)을 사람처럼 묘사한 공방전을 남겼다. 이후 술에 인격을 부여한 소설은 연이어 나왔다. 비슷한 시기 이규보가 지은 국선생전이 대표적이다.

국선생전에서 술은 주객랑중(主客郎中)이라는 벼슬을 지낸다. 주객랑중은 손님맞이를 하는 중책이라는 뜻이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 술이라는 존재를 여느 때고 가까이 두고 즐겼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스 신화 속 디오니소스(Dionysos)는 여느 신과 마찬가지로 고유한 역할과 인격을 갖춘 사람 같은 존재다.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는 술뿐 아니라 풍요와 광기, 다산, 황홀경을 관장한다. 모두 술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된 분야다. 디오니소스는 우리나라에 로마 신화 속 이름 바쿠스(Bacchus)로 더 유명하다.

술에 인격을 더하는 창의적인 노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렇게 꾸준히 이어졌다. 재기발랄한 와인 생산자들 역시 비슷한 시도를 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손꼽히는 내추럴 와인 브랜드 구트 오가우(Gut Oggau)는 가상 가계도(家系圖)를 만들었다. 구트 오가우 와인을 보면 겉면에 와인에 대한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가느다란 펜 선으로 그려진 흑백 인물 그림과 그 인물 이름만 담겨 있다.

이 와인을 처음 만든 스테파니 체페와 에두아르 체페 부부는 오가우라는 상상 속 마을을 만들고, 와인 특성에 맞춰 가족을 구성했다.

그뤼너 벨트리너라는 오스트리아 특산 화이트 와인 품종 포도로 만든 와인 테오도라에는 ‘오가우가(家) 장난꾸러기, 그럼에도 그녀는 가장 믿음직스럽고 한결같다’는 해설을 붙였다.

그뤼너 벨트리너는 입안에서 상큼하면서 진한 감귤 느낌을 준다. 산도가 높아 오래 숙성해서 마시기도 좋다. 포도가 가진 개성을 적절히 의인화한 설명이다.

명랑하고 활기찬 태도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순진하지만 호감이 가는 젊은 아가씨.

그녀는 엄마처럼 매력적이면서도
동시에 뻔뻔스럽고 우아하다.


테오도라, 구트 오가우

다른 와인들 역시 포도 품종에 맞춰 상상 속 오가우 마을에서 할머니, 삼촌, 딸 같은 인격이 주어졌다. 심지어 매년 새로 그리는 겉면에서 이들 얼굴은 미세하게 늙어간다. 표정은 그해 경작 상황에 따라 바뀐다. 세세한 설정까지 신경 쓰는 모습이 마치 와인으로 쓴 국선생전 같다.

그래픽=손민균

미국은 세계 최대 주류 소비 시장이다. 특히 미국 소비자가 일상적으로 마시는 10~30달러 와인 시장은 전 세계 와인 수만 종이 매년 대결을 펼치는 격전지다.

이런 전쟁터에서 살아 남기 위해 일부 브랜드는 와인이 갖는 고유한 특성을 인물이나 상황으로 표현한다.

크로닉 셀라는 2004년 미국 캘리포니아 파소 로블스 지역에 문을 연 신생 와이너리다. 이름난 인근 와이너리들은 대체로 1960년대, 늦어도 1980년 무렵 문을 열었다. 크로닉 셀라는 후발 주자로 미국 시장에 안착하기 위해 해골을 상징으로 내세웠다.

크로닉 셀라가 만드는 모든 와인에는 남성 혹은 여성 모습을 한 해골이 등장한다. 이 해골들은 멕시코 기념일 ‘죽은 자의 날(Día de Muertos)’에 볼 법한 모습이다. 산 사람처럼 옷을 입고, 소품을 활용한다.

크로닉 셀라가 자리 잡은 파소 로블스는 캘리포니아에서도 유난히 중남미계(히스패닉) 인구가 많다. 캘리포니아 주정부 통계에 따르면 이 지역 히스패닉 비율은 36%로 20% 중반대인 캘리포니아 평균보다 10%포인트 정도 높다.

크로닉 셀라 설립자 제이크 버킷과 조쉬 버킷은 이 점에 착안해 히스패닉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해골을 전면에 내세웠다.

동시에 이들에게 이야기를 부여했다. 겉면에 그려진 해골이 하는 행동, 그림 분위기만 봐도 해당 와인을 어떤 상황에 마시기 좋은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가령 제너럴 클러스터라는 와인은 겉면에 난파한 해적선에 탄 해골 제독이 급류에 휩쓸려 상어들을 만나는 위태로운 상황을 그려 넣었다.

이 와인은 크로닉 셀라가 보유한 온갖 포도를 한꺼번에 섞어 만든 와인이다. 말 그대로 여러 포도 풍미가 파도처럼 몰아친다. 여러 포도 맛이 자아내는 긴장감을 겉면 한 장으로 표현했다.

크로닉 셀라에 앞서 화려한 그림으로 소비자 선택을 받으려는 다른 여러 와인 브랜드는 많았다. 그러나 신선한 시도에 못 미치는 와인 품질로 도리어 빈축을 산 경우가 잦았다. ‘겉면으로 현혹하지 말고 품질 관리에 우선 신경을 쓰라’는 비난이 이어졌다.

크로닉 셀라는 이런 비판을 다른 브랜드가 시도하지 않는 새로운 블렌딩(blending·여러 포도를 한군데 섞는 기술)으로 넘어섰다.

이들이 만드는 주력 와인은 프랑스 남부에서 주로 보이는 전형적인 블렌딩에 스페인 포도 품종 그라시아노를 섞어 만든다.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와인을 만드는 캘리포니아에서도 보기 드문 사례다.

이들은 신선한 조합을 꾸리기 위해 라그레인 같이 이탈리아에서도 자취를 감춰가는 토착 포도 품종을 미국 땅에 옮겨 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스프리츠 앤 기글스는 크로닉 셀라가 만드는 스파클링 와인이다. 스프리츠는 탄산이 든 가벼운 마실 거리를 말한다. 기글은 키득거리는 웃음을 뜻하는 영어 단어다. 이름처럼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격의 없이 웃으면서 마시기 좋다.

크로닉 셀라 스프리츠 앤 기글스는 2024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스파클링 와인 부문 대상을 받았다. 수입사는 롯데칠성음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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