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하게 말한다고 모두 ‘깨어 있는 시민’일까 [독서일기]
르네 피스터 지음 배명자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
‘정치적 올바름은 어떻게 우리를 침묵시키는가’라는 부제를 단 르네 피스터의 〈잘못된 단어〉(문예출판사, 2024)에는 다음과 같은 ‘취급주의’ 문구가 붙어 있다. “책의 일부 사례는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럼에도 구호로만 그치는 ‘정치적 올바름’이 아닌, 현실적인 변화를 이끌 방안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꼭 한번 읽어보기를 추천한다(송채경화 〈한겨레〉 기자).”
PC로 줄여 쓰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은 인종·성별·종교·성적 지향·장애·직업 등과 관련해 소수 약자에 대한 편견이 섞인 표현을 쓰지 말자는 정치적·사회적 운동이다. 1970년대 미국의 대학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매스미디어와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전적 설명은 정치적 올바름을 ‘바른 말’ 쓰기 운동으로 축소한다. 〈나와 타자들〉(민음사, 2019)에서 정치적 올바름의 의미와 성과는 물론 실책마저 함께 점검했던 이졸데 카림은 “정치적 올바름의 핵심은 상처받기 쉬운 정체성을 보호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정치적 올바름은 필연적으로 정체성 정치와 만나게 되는데, 인종·성별·종교·성적 지향 등에서 소수자를 가장 크게 억압해온 주범으로 ‘이성애 백인 기독교 남성’이 지목되었다.
2018년 5월 캐나다 토론토에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주제로 멍크디베이트(Munk Debates·캐나다 오리아재단이 주최하는 지식인들의 토론회)가 열렸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프시케의숲, 2019)에는 2인 1조로 구성된 찬성 팀(마이클 에릭 다이슨·미셸 골드버그)과 반대 팀(조던 피터슨·스티븐 프라이)이 2시간 동안 벌인 격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반대 팀의 조던 피터슨은 서구 문명의 특색과 장점은 개인인데 정체성 정치는 개인을 집단으로 대체하려고 한다면서, 각 개인의 정체성을 집단에 소속시키는 것은 부족주의이며 세상을 전쟁터로 만든다고 주장한다.
조던 피터슨을 상대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회학 교수 마이클 에릭 다이슨은 자신도 개인이 되고 싶다면서, 다음과 같은 멋진 아이러니를 던졌다. “스타벅스에서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혐오를 당하는 사람들 집단 속에 제 자신이 스스로 속하길 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미국 사회에서 아프리카계 흑인은 집단으로만 취급되지 절대 개인으로 대우받지 못한다면서, 정체성 정치를 만든 최초의 장본인은 약자들이 아니라고 말한다.
“제가 알아보니, 인종은 지배적 문화가 만들어낸 산물입니다. 지배적 문화가 다른 문화를 지배하기 위한 것이 인종의 발명입니다. 가부장제는 어떨까요? 가부장제는 남성의 독점적 시점을 제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산물입니다. 정체성 정치는 우파가 말하는 혐오의 대상, 즉 ‘검은 야수’로 창조되었습니다. 우파는 처음부터 흑인, 황인, 그 밖의 유색인종과 여성 그리고 성전환자들에게 정체성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까지 강요했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미국 사회의 주류인 이성애자 백인에 의해 정체성이 강요되어온 소수 약자들이 ‘우리에게도 보편적인 시민과 똑같은 권리가 있다’고 외치게 된 것이 정체성 정치다.
가나리 류이치의 〈르포 트럼프 왕국〉(AK커뮤니케이션즈, 2017)에 생생하게 나와 있듯이,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돌풍을 일으킨 백인 일색의 러스트벨트(오대호 주변의 쇠락한 공업지대) 주민들이 트럼프를 지지하게 된 것은 나프타(NAFTA·북아메리카 자유무역협정) 때문이었다. 이 협정이 이뤄지자 많은 제조업이 공장을 멕시코로 옮겼고, 러스트벨트의 주민들은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었다. 하지만 마이클 에릭 다이슨과 한 조가 되어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 분투했던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미셸 골드버그는 다르게 말한다. “아시겠지만 저는 언론인입니다. 대선 캠페인 기간 미국 여러 곳에서 벌어지는 트럼프 지지 집회에 수없이 많이 갔어요. 가는 곳마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불평을 북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불만보다 더 많이 들었습니다.” 정치적 올바름의 발상지인 미국에서 이 운동은 ‘미국은 우리의 것’이라는 백인 대다수의 신념과 갈등을 일으켰고, 그 결과가 트럼프의 승리다.
‘PC’하게 말한다고 다 깨어 있을까
토론회에서 ‘악마의 변호사’ 역할을 맡았던 미셸 골드버그는 여성과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자연 질서’인 듯 당연시하는 사회에서 정치적 올바름 운동이 수행한 진보적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정치적 올바름의 무한 “확장”을 우려한다. 그가 노플랫포밍(no-platforming: 어떤 신념이 위험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해 그것을 공개적으로 표현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 사전 경고(trigger warning: 책이나 강
의에 논쟁적이거나 민감한 화제가 담겼다고 생각할 때 이를 사전 고지하는 문구), 혐오표현 규제법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다. 취소 문화(Cancel Culture: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과 교류를 단절하고, 그 사실을 주위에 공개하는 것)와 미세공격(microaggression)은 정치적 올바름이란 무기고에 새로 추가된 무기다.
〈잘못된 단어〉에서 처음 알게 된 ‘미세공격’은 서구인이 비서구인에게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저지르는 인종차별적 공격을 뜻한다. 이 개념은 미국인이 한국에서 온 이민자에게 “영어 잘하세요?”라고 묻거나, “저에게 수학 좀 가르쳐주실래요?”라고 말하는 것에서 인종차별적인 함의를 찾아낸다. 마찬가지로 한국인은 동남아시아에서 온 이주민에게 “한국 노래 잘하네”라거나, “김치 잘 먹네” 같은 말을 절대 해서는 안 돼요. 이렇게 해서 세상은 정치적 올바름의 지옥이 된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최대의 비판자는 슬라보예 지제크다. 그의 책 어디에서든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판을 볼 수 있다. 정치적 올바름은 소수 약자들이 억압받는 구조를 공략하고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 약자들의 마음을 상처받지 않게 방어하는 것에 치중한다. 더구나 정치적 올바름이 나쁘기까지 한 것은 〈용기의 정치학〉(다산북스, 2020) 어느 대목에 나왔듯이, ‘바른 말’을 아교풀 삼아 적대적인 두 세력을 화해시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노조를 일절 허용하지 않는 아마존의 설립자 제프 베이조스 같은 사람도 얼마든지 정치적으로 올바른 말을 애용할 수 있고, 여성과 흑인·라틴계 임원의 비율을 높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자본가가 우리들의 깨어 있는 동료일 수 있을까. “바로 여기에 PC 운동의 정치적 문제점이 있다. PC 운동은 삶의 불평등을 인식하면서도, 혁명 없는 혁명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장정일 (소설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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