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핵시설 공개한 김정은 “보기만 해도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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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우라늄 농축시설 첫 공개, 왜
북한이 13일 핵무기 제조에 사용되는 고농축우라늄(HEU) 시설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미국 대선을 50여일 앞두고 핵시설을 공개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여 선거에 영향을 미치고, 한반도 정세의 주도권을 쥐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일각에선 향후 비핵화를 거부하고 핵 군축 협상을 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노동신문은 이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핵무기연구소와 핵물질 생산기지를 방문해 핵탄두와 핵물질 생산 실태를 보고 받고 생산 확대를 위한 과업을 제시했다고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김정은은 “정말 이곳은 보기만 해도 힘이 난다. 전술핵무기 제작에 필요한 핵물질 생산에 총력을 집중하고,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른 신형 원심분리기 도입 사업도 계획대로 추진해 생산 토대를 한층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신문은 현장 사진 5장을 통해 우라늄 농축시설의 핵심 장비인 ‘원심분리기 캐스케이드(원심분리기를 다단계로 연결한 설비)’를 비롯한 설비들을 이례적으로 공개했다.
다만 김정은의 방문 일자나 지역, 시설명 등을 밝히지 않아 아직 어떤 핵시설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북한 당국이 핵시설 위치를 명시하지 않았지만, 전문가들은 우라늄 광산이 있는 평양 인근 강선단지 내 시설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미 정보 당국은 그동안 강선단지를 북한의 비밀 핵시설이 있는 곳으로 지목해왔다. 지난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노딜로 실패했던 것도 강선단지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은, 미 대선 앞두고 핵 생산력 과시 몸값 올리기 속셈
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 EA) 사무총장도 지난 6월 “올 2월 말 강선단지에서 시설 면적을 넓히기 위해 별관 공사가 시작됐다”고 밝혔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강선단지 별관 공사가 완공 단계에 이르러 김정은이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북한은 영변과 강선 외에도 박천, 영저리, 천마산, 태천, 하갑 등에 우라늄 농축시설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정확한 위치 파악에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캐스케이드를 다량으로 공개했다는 점에서 제3의 장소라기 보다는 그간 꾸준히 시설을 확장해온 영변 핵시설이거나 강선 핵시설일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이날 북한이 공개한 핵시설 중 가장 이목을 끄는 것은 원심분리기 캐스케이드다. 영변 핵 단지에 있는 우라늄 농축시설에 비해 규모가 대폭 커졌기 때문이다. 영변 우라늄 농축시설이 공식 확인된 것은 지난 2010년 11월인데, 당시 북한은 미국 핵물리학자인 지그프리드 헤커 박사를 초청해 시설을 보여줬다.
이춘근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은 “북한이 헤커 박사에게 보여준 영변의 원심분리기는 2000개 수준이었다”면서 “이번에 공개된 시설의 원심분리기는 최소 수천개에서 수만개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평가했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은폐가 가능한 시설에서 워낙 은밀하게 생산하기 때문에 한·미도 대략적인 생산량과 생산 능력을 추정할 뿐”이라며 “북한 또한 이날 최초로 우라늄 농축시설을 공개하면서 구체적인 정보를 노출하지 않으면서도, 앞으로 더 많은 핵물질을 생산하겠다는 위협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을 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최근까지 우라늄 농축을 위한 시설을 늘렸거나 개량형을 도입했다면 핵무기 생산 능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춘근 연구위원은 “헤커 박사가 목격했던 영변의 P2 형태의 원심분리기 2000개로 북한은 2010년에 이미 매년 40㎏의 HEU를 생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후 영변과 강선 등 핵시설의 확장, 시설 개량 가능성까지 고려하면 최대 연간 200~400㎏ 규모의 HEU 생산도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핵무기 1기 제조에는 고농축 우라늄 15~20㎏이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핵물질 생산 확대를 강조하는 이면에는 핵무기 수 우위를 기반으로 하는 ‘2차 공격’ 능력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깔렸다고 지적한다. 전봉근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는 “실효적인 핵 억제력을 가지려면 적의 핵 1차 타격에 살아남아 반격할 수 있는 2차 핵 타격 능력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라며 “북한도 이를 위해 핵무기를 100~200기 이상으로 늘려 핵의 생존성을 높이려는 의도”라고 평가했다.
일반적인 핵무기의 생존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핵 격납고의 방호력을 높이거나 미사일 방어 체계를 갖추는 방식을 사용하는데, 이를 갖추기 어려운 북한이 핵무기 보유량을 극단적으로 늘리는 방향으로 2차 공격 능력을 확보하려는 것이란 설명이다.
또 김정은은 이날 “최근에도 미제를 괴수로 하는 추종 세력들이 공화국을 반대하여 감행하는 핵 위협 책동들이 더욱 노골화되고 위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고 비난했다. 확장억제를 강화하고 있는 한·미·일의 협력을 지칭한 것으로, 자국의 핵 무력 증강을 자위권 차원의 정당한 조치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미국이 핵 기반의 군사 블록을 만들어 자신들을 압박한다는 김정은의 정세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며 “북한이 책임 있는 핵보유국이라고 강조하면서도 핵무기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겠다는 이중적인 메시지를 발신하는 것도 한·미를 의식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한편 정부는 이날 북한이 우라늄 농축시설을 공개하며 ‘핵능력의 가속적 강화, 전술핵 무기용 핵물질 생산’을 언급한 것에 대해 “강력히 규탄한다”고 밝혔다. 구병삼 통일부 대변인은 정부 입장문을 통해 “북한의 불법적인 핵무기 개발은 다수의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의 명백한 위반”이라며 “북한의 어떠한 핵 위협이나 도발도 굳건한 한·미동맹의 일체형 확장억제 체제를 기반으로 한 우리 정부와 군의 강력한 대응에 직면하게 될 것임을 엄중히 경고한다”고 말했다.
정영교·박현주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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