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서 문학상 받은 김혜순, 獨·佛서도 뜨거운 관심

광주광역시/황지윤 기자 2024. 9. 14.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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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수상 이후 첫 공개 행사
광주비엔날레 독일관서 시 낭독회
12일 광주비엔날레 독일관에서 대담과 낭독을 진행한 시인 김혜순. 그는 “내가 죽은 후에도 나로 있을 수 있을까? 어느 순간 죽으면 우리는 복수적 존재로, 형용사나 부사 같은 상태로 있을 것”이라고 했다. /김영근 기자

“아님이 아니한 아님은 아님이 아니나니 아님이 아님을 아니할 아님이요….”

12일 오후 광주비엔날레 독일관에서 열린 행사에서 시인 김혜순(69)이 시 ‘아님’을 주문처럼 외기 시작했다. 이런 시구가 쉴 새 없이 이어진다. 혀가 꼬일 법도 한데 묘기처럼 낭독을 마쳤다. 곧이어 번역가 박술(38)이 배턴을 이어받았다. ‘아님’을 뜻하는 독일어 ‘Nicht(니히트)’의 온갖 변형이 속사포처럼 쏟아졌다. 마치 랩 같다. 객석에서 누군가 ‘휘익’ 휘파람을 불고, 킥킥거리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김혜순도 그를 곁눈질로 보더니 슬며시 웃었다.

12일 광주비엔날레 독일관에서 대담과 낭독을 진행한 시인 김혜순(오른쪽)과 왼쪽은 번역가 박술. /김영근 기자

지난 3월 시집 ‘날개 환상통’으로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NBCC) 시 부문을 수상하고 첫 공개 행사다. 2016년 작인 ‘죽음의 자서전’(문학실험실)은 내년 2월 독일 유명 문학 출판사 피셔에서 독일어판 출간을 앞두고 있다. 독일 힐데스하임대 철학과 조교수 겸 번역가인 박술과 독일 시인 울리아나 볼프가 공역했다. 좀처럼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시인을 만나기 위해 시인 김소연·오은·유희경 등도 광주로 내려왔다.

미국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김혜순 시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작년 6월 베를린 시 축제에서 김혜순 시인이 진행한 강연 ‘Tongueless Mother Tongue(혀가 없는 모국어)’을 두고 독일 신문 ‘데어 프라이탁’은 “김혜순은 파울 첼란과 동급”이라며 치켜세웠다. 파울 첼란(1920~1970)은 괴테·횔덜린·릴케를 잇는 20세기 독문학 최고 시인으로 꼽힌다. 시집 ‘날개 환상통’ 프랑스어판도 오는 3월 출간된다. 미국 뉴욕에서 주로 활동하는 번역가 겸 시인 안수연도 이날 행사를 찾았다. 그는 “김혜순 시인은 이미 세계적 반열(world-class)에 올라 있다”고 했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한국의 문단 관계자들은 “5년 내로 한국 시인이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면 이는 김혜순일 것”이라며 수군거리고 있다.

‘죽음의 자서전’에는 하루부터 마흔 아흐레까지 총 49편의 시가 실렸다. 49재(齋)에 빗댄 것이다. 김혜순은 “시인은 죽어가는 모든 것에 책임을 갖는 존재”라며 “죽음을 실천해나가는 것이 시대의 정치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시를 썼다. 아이들의 죽음이 있었고, 부모의 죽음이 있었고, 그 죽음으로 가득 찬 상자를 계속 닦았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많아서 유령의 밀도가 높은 나라예요. 그런 사건들 속에서 다양한 존재들의 빼곡한 죽음에 답하고 싶었어요.”

스무아흐레의 시 ‘저녁 메뉴’도 낭독했다. “오늘 엄마의 요리는 머리지짐/ 어제 엄마의 요리는 허벅지찜/ 내일 엄마의 요리는 손가락탕수… 너는 오늘 밤 그 프라이팬에/엄마의 두 손을 튀길 거네” 엄마를 요리하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시인의 설명을 들으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엄마를 듬뿍 먹고 태어나잖아요. 또 우리는 지구라는 엄마를 평생 먹고 살다가 죽어요. 그래서 엄마의 부엌은 엄마를 잘라 요리하는 것처럼 보여요.”

지난 3월 '날개 환상통'으로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시 부문을 수상한 이후 공개 행사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시인 김혜순. /김영근 기자

번역가 박술이 ‘주어 없음’으로 인한 번역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대체 몇 인칭인가요?” 묻자 시인은 답했다. “주어 없이 죽음이라는 사건만 출몰하고, 익명의 목소리가 동사로만 행위해요. 그렇게 리듬을 타요. 일부러 주어를 안 쓰기도 했어요. 자기로부터 탈존(脫存)한 존재가 쓰는 글이자, 나를 죽임으로써 여럿이 된, 복수적 존재가 되는 글쓰기예요. 죽음은 어쩌면 6인칭 또는 7인칭일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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