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라늄 농축 시설… 北, 美 보란듯 공개

양승식 기자 2024. 9. 14.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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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대선 50여일 앞두고 核 과시
김정은 “보기만 해도 힘 난다”
원심분리기 확대 등 강화 주문
끝없이 연결된 원심분리기 -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13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핵무기 연구소와 무기급 핵물질 생산시설’을 방문해 현지 지도했다며 사진을 공개했다. 수천 대의 원심분리기를 이용해 핵무기에 쓰이는 고농축 우라늄(HEU)을 생산하는 시설로, 북한이 사진을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북한이 13일 핵탄두를 만드는 데 쓰이는 고농축 우라늄(HEU) 제조 시설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북한이 이번에 공개한 HEU 제조 시설은 2019년 2월 ‘하노이 노딜’ 당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에 폐기를 요구했던 곳으로 알려졌다. 대선을 50여 일 앞둔 미국에 핵 시설 건재를 과시하고, 향후 미국과의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됐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핵무기 연구소와 무기급 핵물질 생산 시설을 현지 지도하고, 무기급 핵물질 생산을 늘리기 위한 중요 과업을 제시했다고 보도했다. 김정은은 우라늄 농축 기지를 돌아보며 “정말 이곳은 보기만 해도 힘이 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원심분리기 대수를 더 많이 늘이는 것과 함께 원심분리기의 개별분리능을 더욱 높이라”며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른 신형 원심분리기 도입 사업도 계획대로 내밀어 무기급 핵물질 생산 토대를 한층 강화하라”고 했다.

북한은 HEU 제조 시설의 위치를 공개하지 않았지만, 평안북도 영변이나 평양 인근 강선 단지가 거론되고 있다. 한미 정보 당국은 김정은 방문 시설이 강선 단지일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김정은이 공사 현장을 돌아봤다고 했는데, 강선 단지 확장 정황이 최근 포착됐기 때문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지난달 보고서를 통해 강선 단지에 건물 개축 공사가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통일부는 이날 북한의 우라늄 농축 시설 공개를 강력 규탄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와 국제사회는 북한의 핵 보유를 결코 용인하지 않을 것임을 북한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픽=김현국

우라늄 농축기지는 자연 상태의 우라늄을 핵탄두 제조가 가능한 수준으로 농축하는 시설이다. 핵무기 제조를 위해서 우라늄에 있는 핵분열성 물질인 U-235의 함량을 90% 이상으로 높인 고농축 우라늄(HEU)이 필요하다. 우라늄 고농축에 필요한 장치가 바로 원심분리기다.

조선중앙통신이 이날 공개한 사진을 보면, 시설 안에는 HEU를 얻는 데 사용되는 원심분리기와 캐스케이드(연속 농축을 위해 원심분리기 다수를 연결한 설비)가 빈틈없이 꽉 차 있다. 북한은 자체적으로 원심분리기 생산 능력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파키스탄의 핵과학자 압둘 칸 박사로부터 P1·P2형 원심분리기 설계도를 받고 우라늄 농축 기술 개발에 나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규 한국국방연구원(KIDA) 연구위원은 “P1·P2 원심분리기 높이는 약 2m 정도인데, 오늘 공개된 사진을 보면 원심분리기 높이가 170㎝ 안팎으로 추정되는 김정은의 키와 비슷해 개량형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김정은(맨 왼쪽) 북한 국무위원장이 핵무기연구소와 무기급 핵물질 생산 시설을 현지 지도하고 무기급 핵물질 생산에 총력을 집중해 비약적인 성과를 낼 것을 지시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3일 보도했다. 김정은 앞으로 우라늄 농축 시설이 가득 설치돼 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2010년 북한 영변 핵시설 내 우라늄 농축 시설을 참관했던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는 북한이 2000개의 원심분리기를 가동하고 있다고 했다. 이후 북한이 강선 단지 등의 우라늄 농축 시설을 확장했다면 1만개까지 원심분리기를 가동 중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데이비드 올브라이트 미 국제과학안보연구소(ISIS) 소장은 작년 미국의 소리(VOA) 인터뷰에서 “북한이 영변 외에 우라늄 농축 시설을 1~2곳 더 운영하고 있다”며 “7000개에서 최대 1만개의 원심분리기를 가동 중”이라고 했었다.

1만개의 원심분리기로는 연간 200㎏의 HEU를 얻을 수 있다. 핵무기 1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HEU 25㎏가량이 필요하기 때문에 북한은 연간 8기의 핵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계산이 나온다.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는 “영변을 비롯한 고농축 우라늄 제조 시설이 대폭 확대된 것으로 볼 때 원심분리기가 1만개를 넘을 수 있다”며 “HEU만으로 연간 10~20기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것으로 본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북한의 핵 제조 능력이 전문가들의 예상을 훨씬 상회할 수 있다는 말도 나왔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2019년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 결렬 당시 북한에 폐기를 요청했던 핵 시설을 ‘5곳’이라고 했다. 이 시설이 모두 확장됐다면 북한의 핵 능력은 기존 예상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

핵탄두는 HEU와 플루토늄으로 만들 수 있는데, 북한은 최근 영변 원자로에서 소량 생산하는 플루토늄보다 지하에서 은밀히 대량으로 만들 수 있는 HEU 생산에 주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발표에 따르면, 북한 우라늄 매장량은 2600만t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 중 채굴 가능량은 400만t 규모로 평가된다. 시설이 늘어나면 그만큼 HEU로 핵무기를 더 만들 수 있다. 플루토늄은 원자로를 가동해야 하기 때문에 생산 규모를 대폭 늘리는 게 상대적으로 제약된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이날 북한의 HEU 제조 시설 공개에 대해 “북한의 공개 의도 등을 면밀히 파악하는 중이며, 북한 전반 동향을 관찰하고 분석 중에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북한의 HEU 시설 공개가 명백히 미국을 겨냥한 것으로 봤다. 미 대선 1차 토론회 이틀 후 핵시설을 공개함으로써, 대선 레이스에서 북핵 문제가 화두로 떠오르길 노렸다는 것이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2019년 2월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 결렬의 이유였던 고농축 우라늄 시설의 건재를 과시했다”며 “사실상 자신들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라는 명확한 정치적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했다. 남주홍 전 국정원 1차장은 “드러내놓고 완전히 안방을 공개한 것과 마찬가지”라며 “김정은이 자신감을 표현한 것이며, 미국과 담판을 하자고 나설 것”이라고 했다.

☞원심분리기·캐스케이드·HEU

원심분리기: 우라늄을 넣고 고속 회전시켜 핵폭탄에 필요한 고농축 우라늄(HEU)으로 농축하는 장치. 회전 속도가 높을수록 분리 능력이 커지기 때문에 소재(강철, 탄소섬유), 운영 기술이 중요하다.

캐스케이드: 원심분리기를 수백~수천 개 병렬로 붙인 설비. 캐스케이드 단계를 많이 거칠수록 우라늄이 고농축된다.

고농축 우라늄(HEU): 천연 우라늄에 0.7%밖에 없는 U235(우라늄235)의 비율을 원심 분리 등의 방법으로 20% 이상으로 높인 것. 핵무기에 쓰이는 HEU는 U235의 비율이 90%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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