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편 빼고 싹 바꿨습니다… 모던 미식가가 제안한 글로벌 차례상
모던 미식가 조상님 위해
제안하는 글로벌 차례상
“자손들아, 이번 추석 차례상은 좀 다르게 차려주면 안 되겠니? 해마다 똑같은 음식에 싫증이 나 부아가 치미는구나.”
추석을 앞두고 조상님이 꿈에 나타났다. 남들이 알아주는 미식가였다. ‘그런 조상님이라면 이런 음식도 받아 보고 싶지 않으실까’ 상상하며 차례상을 새로 차렸다. 모던 미식가 조상님을 위해 ‘아무튼, 주말’이 제안하는 차례상 혁명.
명절 차례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것이니 여러 말 말고 따라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최영갑(60) 성균관유도회 총본부 회장은 “지난해 간소화 방안을 발표했듯이 차례도 시대에 맞게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자손이 잘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올리면 된다. 요즘 사람들은 즐기지 않는 잣이나 은행 따위는 내려도 된다. 수입 과일? 바나나면 어떻고 파인애플이면 어떤가. 치킨, 피자도 좋다. 조율이시나 홍동백서도 무조건 따를 필요 없다. 음식 진설은 가가례(家家禮)라 하여 집안마다 지역마다 다르다. 남의 집 제사에 가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거 아니다.
‘미식가 조상을 위한 차례상’은 성균관유도회의 간소화 표준안을 따랐다. 구성은 과일 네 종류, 백김치, 구이(적), 나물, 송편(또는 떡국), 술 등 아홉 가지. 간소화 표준안 내용 중 주부들이 가장 환호한 대목은 ‘전은 부치지 않아도 된다’였다. 나이 지긋한 며느리들은 격렬하게 분노했다. “그렇게 중요한 걸 왜 이제야 알려주냐”며. 성균관유도회는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명절에 가족이 잘 모이지도 못하다 보니 차례를 지내는 집이 크게 줄었고, 이대로 가면 정말 차례라는 전통이 아예 사라지겠다는 위기감을 느낀다”며 “그간 고생하신 며느님들 너무 늦어 정말 죄송하다”고 했다.
‘아무튼, 주말’이 만든 차례상은 간소화 표준안을 따르되 요즘 인기 있는 음식으로 선수를 교체했다. 과일로는 애플망고와 샤인머스캣을 골랐다. 본래 차례상은 과일 네 종류를 올리게 돼 있는데, 나머지 둘은 과일 대신 과자를 선택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과자를 과일 대용품이란 뜻으로 조과(造菓)라 불렀다. 제철 과일이 없는 계절의 제사상에 과일 대신 올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최영갑 회장은 “한과의 유래가 그렇다면 과일 대신 과자를 올려도 무방할 것”이라고 했다.
개성주악은 요즘 MZ세대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찹쌀가루에 멥쌀가루나 밀가루를 섞고 막걸리나 소주를 더해 반죽해 둥글게 빚고 기름에 지진 뒤 꿀이나 조청에 재우는데, 그 모양이 작고 앙증맞은 사과 같다. 다른 과자로는 마카롱을 골랐다.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프랑스 왕과 결혼하며 소개해 이젠 프랑스를 대표하는 과자.
구이(적)로는 토마호크 스테이크를 올렸다. 길다란 갈비뼈를 감싸는 갈빗살이 등심에 붙은 형태로 정형된 소고기로, 북미 원주민이 사용하던 토마호크 도끼와 닮았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적(炙)은 본래 불에 구워 먹는 음식을 통칭하는 말로 사용되다가 꼬챙이에 여러 재료를 꿴 음식으로 의미가 변했다.
중국 후한 말기 사서인 ‘석명(釋名)’에 따르면 부여족에서 유래한 맥적(貊炙)은 고기를 통으로 구워 각자가 칼로 잘라 먹는 음식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고대의 우리 민족은 사냥과 유목생활을 주로 하였기 때문에 고기를 많이 먹었으나, 농경생활이 정착됨에 따라 고기를 구하기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통구이에서 점차 변하여 고기를 작게 잘라 꼬챙이에 꿰어 쓰게 되었고, 고기 이외에 채소 등의 다른 재료도 같이 꿰어 쓰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고 적었다.
나물의 경우 침체(沈菜) 즉 백김치는 그대로 두되 숙채(熟菜) 즉 익혀서 무친 고사리·도라지·시금치 등 삼색나물은 샐러드로 대신했다. 나물은 본래 사람이 먹을 수 있는 풀이나 나뭇잎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최 회장은 “권장하지는 않지만 가족이 나물 대신 샐러드를 차례상에 올렸다가 먹기로 했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고 했다.
송편은 조상님이 추석 차례상인지 몰라볼 것 같아 그대로 뒀다. 사실 송편이 추석 대표 음식이 된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다. 송편은 오래전부터 사랑받은 떡으로 추석에만 먹지는 않았다. 음력 2월 1일 본격적 농사 시작에 앞서 일꾼들을 하루 놀리고 먹이던 ‘머슴날’이나 6월 15일 유두절에 농사 일꾼들을 격려하며 나눠 주기도 했다. 송편이 추석 대표 음식으로 자리 잡은 건 1970년대 이후. 통일벼 개발로 쌀 생산량이 급증했고, TV 보급으로 추석에 송편이나 다른 떡을 만들지 않던 지역에서도 빚어 먹게 됐다고.
술은 청주를 내리고 와인을 올렸다. 프랑스 부르고뉴 풀리니-몽라셰(Puligny-Montrachet) 지역에서 생산되는 레드와인 ‘도멘 토마-콜라도’. 풀리니-몽라셰는 고급 화이트와인 산지로 이름 났지만, 훌륭한 레드와인도 생산된다는 사실은 덜 알려졌다. 미식가 조상님이라면 풀리니-몽라셰 화이트와인은 당연히 드셔 봤겠지만, 같은 지역 레드와인도 있다는 걸 아신다면 깜짝 놀라며 즐겁게 흠향하시지 않을까.
그리하여 저 사진처럼 미식가 조상님도 반기고 가족들도 흐뭇하게 나눠 먹을 수 있는 글로벌 차례상이 만들어졌다. 모두 다 합쳐서 약 24만원으로,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가 발표한 올해 6~7인 가족 기준 차례상 차림 비용 28만8727원(대형 마트 기준)보다 적게 든다. 애플망고는 브라질산, 스테이크는 미국산, 와인은 프랑스산. 세상은 넓고 먹을 것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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