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이 선전하는 것만 보고 예찬 쏟아낸 ‘소련 사절단’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1946년 訪蘇 사절단과 소설가 이태준의 비극
“참으로 황홀한 수개월이었다. 인간의 낡고 악한 모든 것은 사라졌고 새 사람들의 새 생활, 새 관습, 새 문화의 새 세계였다. 그리고 소련은 날로 새로운 것에로, 마치 바다로 향해 흐르는 대하(大河)처럼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었다.”(이태준, ‘소련기행’)
해방 1주년을 닷새 앞둔 1946년 8월 10일, 소련군이 제공한 비행기 2대에 나눠 탄 ‘방소(訪蘇)사절단’(이하 사절단) 25명은 수백 인파의 환송을 받으며 평양 비행장을 출발했다. 단장은 사회주의 문학을 대표하던 소설가 이기영이었고, 부단장은 사회주의 여성 운동가 허정숙이었다. 그 밖에 이찬, 이태준, 최창석, 허민 등 문화‧예술인, 정당‧사회단체 대표가 사절단에 포함되었다.
이태준은 해방 전 이효석, 정지용, 이상, 김유정 등과 ‘구인회’를 함께하며 문학의 예술성, 순수성을 추구하던 소설가였다. 하지만 해방 후 ‘인민민주주의’에 공감했고,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문화부장 등 좌익 문화계의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좌익 계열 현대일보에 소설 ‘불사조’를 연재하던 그는 1946년 7월 돌연 연재를 중단하고 38선을 넘어가 사절단에 참여했다. 민전 사무국장 이강국은 “순수문학의 대가(大家)이며 그 붓을 통한 영향이 지대한” 이태준이 ‘민주주의자’로 전향한 것은 그 자신을 위해서도 경하할 일이지만 ‘민주 진영’의 거대한 수확이라며, 이태준의 붓을 통해 일제가 조선 인민에게 남긴 ‘공소(恐蘇)‧반공의 선입관념’을 일소할 계기가 된 것을 기뻐했다.
10월 17일까지 두 달 넘게 이어진 방소 기간 동안 사절단은 모스크바, 스탈린그라드, 레닌그라드, 아르메니아, 그루지야(조지아) 등 소련 곳곳을 누비며 ‘조소 친선’을 도모했다. “소련의 선진 문화와 제도를 견학하고, 그로부터 ‘새 조선’ 건설에 밑거름이 될 자양분을 마련하는 것”이 사절단의 목표였지만, “스탈린 대원수에게 보내는 425만여 명이 서명한 해방 감사 메시지”, “비단실로 수놓은 스탈린 대원수 초상” 등을 전달하는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사명이었다.
사절단은 아르메니아에서 버스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지만 공장, 농장, 대학, 연구기관, 문화궁전, 출판기관 시찰 등 소련 대외문화협회(VOKS)에서 기획한 꽉 짜인 일정을 소화했다. 정부 기관, 산업체, 종교계, 언론계 등 각 분야 주요 인사들과 면담했고 박물관, 미술관, 전람회, 11편의 연극, 17편의 영화를 관람했다.
평양으로 돌아온 사절단은 ‘인민의 나라 소연방의 약진상’(이기영), ‘소련기’(이찬), ‘소련참관기’(허민) 등 기행문을 쏟아냈다. 이태준도 평양에 남아 ‘소련기행’을 집필했고 이듬해 5월 남북한에서 동시에 출간했다. 출간에 맞춰 ‘동아일보’ ‘대중신보’ ‘독립신보’ ‘노력인민’ 등 일간지 1면에 광고가 대대적으로 게재되었다.
“전민족적 대망(待望)의 서(書). 소련 여행 3개월간의 세기적(世紀的) 기록. 숭고한 애국심과 진정한 민족적 양심에 비친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전모! 좌우 막론 만인(萬人) 필독.” ‘숭고한 애국심’ ‘민족적 양심’으로 쓴 책이라는 광고와 달리, 이태준의 ‘소련기행’은 소련에 대한 무비판적 예찬으로 일관되었다.
“소련의 국회의사당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크렘린에 있다. (…) 단순히 소비에트연방의 의사당이 아니다. 인류가 가져본 사업 중에 가장 크고 옳은 사업의 기관실인 것이다. 자유와 문화의 복리가 전 인류에게 미치며 전 인류의 영구한 평화 상태를 향해 나아가는 ‘계획사회’의 출현은 여기가 처음이기 때문이다. 만강(滿腔)의 경의를 표해 옳은 것이다.”
“지하철 정거장들은 대중의 지하 궁전이란 느낌을 주도록 화려하다. 대리석의 기둥과 벽과 애국자들의 입체상, 혹은 부조로 제정 시대 궁전 꾸미듯 했고, 상반은 창공색, 하반은 심록(深綠)의 차체도 고왔다. 고속의 주행은 교통이라기보다 일종 오락 같았다.”
“우리가 탄 기차는 일등차인 듯했다. (…) ‘소련은 모두가 무차별이다’ 이렇게 단순한 기대로 왔다가 이런 등급을 보면 딴은 의아할 수 있는 것이다. 소련은 한창 ‘모두가 무차별한 사회’로 개조되고 있는, 장래는 모두가 무차별의 가능성이 자라고 있는 사회라고 생각하면 이내 이해된다. 인민이 모두 일등차에 탈 수 있을 만큼 생활문화를 끌어올리고 나서 2, 3등차를 없애고 일등차만 남기는 것이 합리적인 순서일 것이다.”
사회주의자조차 낯이 뜨거워질 이태준의 소련 예찬을 두고 비판이 쏟아졌다. ‘경향신문’에 연재된 이동봉의 반론은 구구절절 폐부를 찔렀다.
“나는 소련에는 가본 일도 있고, 또 소련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바이다. 그럼에도 이씨의 기행문을 읽으면 속이 시원하다. 비행기를 타고 이 복잡한 조선을 떠나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복잡하고 피로한 두뇌에 청량제인지 모르는 까닭이다. (…) 그러나 이씨가 보고 온 소련은 소련의 많은 면 중 가장 좋은 면일 뿐이다. 이태준씨는 모스크바에 가서 대외문화협회의 안내로 견학했다. 대외문화협회란 소련의 대외 선전기관으로 외국 여행객이나 초청객에게 소련의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어용 기관이다. 이태준씨는 소련이 보라는 면을 보고, 소련의 들으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1947. 8. 10.)
“모스크바의 지하철은 소련 선전에 곧잘 이용된다. 대리석으로 지하철 역사를 만들었으니 정말 훌륭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돈 많은 영국이나 미국에서도 지하철에 대리석을 사용할 생각을 하는 건축가는 없을 것이다. 지하철은 편리하고 견고하고 청결하고 위생적이면 그것으로 사명을 다한다. 이곳에 대리석으로 별별 장식을 다한대야 그것은 건축사상 난센스에 불과하다. 이것을 보고 조선에서 간 시골뜨기들이 놀라고 찬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마는 우리가 모스크바에 가면 좀 더 다른 것을 보고 와야 할 것이 아닐까.”(1947. 9. 14.)
이태준은 소련 방문 후 평양에 머무는 방식으로 월북했다. 1948년 ‘10월 혁명 32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소련방문사절단’으로 한 차례 더 소련을 방문했고, 6‧25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 종군 작가로 참여해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와 ‘다부동 전투 참전기’를 썼다. 순수문학을 버리고 ‘사회주의 조국 건설’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한 그였지만, 1953년 남로당 숙청 과정에서 “식민지 기간 구인회를 조직해 순수문학, 예술을 위한 예술을 외치며 반리얼리즘 투쟁을 전개했다”는 이유로 숙청되었다. 이태준이 ‘민주주의자’로 전향한 것을 경하하던 이강국은 ‘미제의 간첩’ 혐의로 처형되었다. 이태준은 탄광, 협동농장에서 노동자로 전전하다가 1960년대 이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참고문헌>
배개화, ‘문학의 희생: 북한에서의 이태준’, 한국현대문학연구 제34호, 2011
이태준, ‘이태준 전집 6: 쏘련기행, 중국기행 외’, 소명출판, 2015
임유경, ‘조소문화협회의 출판‧번역 및 소련방문 사업 연구’, 대동문화연구 제66호, 2009
임유경, ‘오뻬꾼과 조선사절단, 그리고 모스크바의 추억’, 상어학보 제27호, 2009
임유경, ‘소련기행과 두 개의 유토피아’, 민족문학사연구 제61호,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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