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유묵을 받은 사카이는 을미사변 범인이었다[박종인 기자의 흔적]
안중근 유묵에 숨은 역사의 아이러니
1909년 10월 30일 중국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에서 관동도독부 여순고등법원 검찰관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가 안중근에게 물었다. “왜 이토 공작을 적대시하는가?” 첫 번째 답은 이러했다. “이토의 지휘로 한국 왕비를 살해하였다.”(’한국독립운동사자료 안중근편1′, 2.1909년 10월 30일 미조부치 신문조서)
그리고 1910년 2월 7일 첫 공판이 열릴 때까지 안중근은 조선 통감부 경시(警視·총경급) 사카이 요시아키(境喜明)로부터 신문을 받았다. 한국어에 능한 사카이와 안중근은 열세 차례에 걸친 신문 과정에서 인간적 친분을 쌓았다. 2월 9일 안중근은 세 번째 공판에서 다시 한번 왕비 민씨 살인죄를 역설했다. 사카이는 이미 조선으로 돌아가고 없었다.
2월 14일 사형이 확정되고 어느 날 안중근이 서울로 복귀한 사카이에게 시를 써서 보냈다.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思君千里(사군천리·천 리 떨어진 당신을 생각하오)’.
사카이 요시아키(境喜明). 본명 사카이 마쓰타로(境益太郎). 이 자가 바로 1895년 10월 8일 경복궁에 난입해 왕비 민씨 살인에 가담한 일본영사관 소속 순사다. 안중근도 몰랐고 사카이도 몰랐을, 역사의 아이러니.
유묵, 민족주의에 매몰된 진실
서울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앞 광장에는 안중근이 쓴 글들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 후 여순감옥에서 쓴 글들이다.
‘國家安危 勞心焦思(국가안위 노심초사)’. 검찰관 야스오카 세이시로(安岡靜四郞)에게 써준 글이다. 기념관에 전시된 원본에는 이 수신인이 적혀 있다. 그런데 비석에는 이름도, ‘드린다’는 뜻의 ‘謹拜(근배)’ 두 글자도 없다. 광장에서 기념관으로 내려가는 복도 벽면에도 유묵들이 새겨져 있다. 이 가운데 ‘장부가 죽더라도 마음은 철과 같다’는 ‘丈夫雖死心如鐵(장부수사심여철)’ 유묵 또한 ‘맹경시에게 준다’는 ‘贈猛警視(증맹경시)’와 ‘謹拜’가 삭제돼 있다.
감옥 통역관 소노키(園木)에게 써준 ‘日韓交誼 善作紹介(일한교의 선작소개, ‘한일 간 우의를 잘 소개함’)’ 유묵은 아예 원본이 사라지고 ‘交誼’를 제외한 다른 글자들이 뭉개진 사진만 남아 있다.
사진을 포함해 현존하는 안중근 유묵 66점 가운데 일본인에게 준다고 적혀 있는 글들은 모두 이곳저곳에서 수신인이 훼손된 채 대중에게 소개돼 있다.(도진순, ‘안중근의 ‘근배’ 유묵과 사카이 요시아키 경시’, 한국근현대사연구104, 한국근현대사학회, 2023)
왜 이런가. ‘일본인에게 주는 글’이라는 민족주의적 반감이 만든 왜곡이다. ‘싫은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고 ‘보고 싶은 역사’만 보려 하는 피해의식이 원인이다.
‘思君千里(사군천리)’와 대한의군
획일적 민족주의는 사실을 왜곡시킨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안중근 유묵이다. 안중근이 남긴 글 가운데 매우 서정적인 시가 한 편 있다.
思君千里 望眼欲穿 以表寸誠 幸勿負情(사군천리 망안욕천 이표촌성 행물부정)
천리 밖 님을 생각하며/ 눈이 빠지도록 바라본다/ 작은 마음 표했으니/ 행여 제 정 잊지 마소
받는 사람이 적혀 있지 않은 시다. 이 시를 민족주의적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임금에 대한 간절한 충정과 애국열정’(윤병성 역편, ‘안중근 문집’,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1, p639. 도진순, 앞 논문 재인용)으로 해석한다. 심지어 ‘안중근이 속한 대한의군을 만든 고종에게 바치는 시’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이태진, ‘지식인 안중근’, 태학사, 2024, p174)
사실을 무시하고 역사를 ‘보고 싶은 대로’ 보겠다는 시각이다. 흔히 재판 과정에서 안중근이 스스로를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이태진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고종 군자금으로 의군(義軍)이 창설됐고, 그 병력은 대한의군이라고 불렀다’고 했다.(이태진, 앞 책, p150) 하지만 공판 기록이나 예비진술, 본인이 쓴 옥중 자서전 ‘안응칠역사’ 어디를 봐도 ‘대한의군’이라는 조직은 나오지 않는다. 안중근 스스로 밝힌 직책은 ‘의병’ ‘독립군 의병’(‘안중근사건공판속기록’, ‘애국충정 안중근 의사’, 법경출판사, 1990, pp.12, 41), ‘대한국 의병’(‘안응칠역사’) 참모중장이었다. 고유명사 ‘대한의군’은 1961년 3월 26일 ‘동아일보’에 당시 고려대 사학과 교수 신석호가 쓴 ‘인간 안중근’에 처음 등장할 뿐이다.
이 시를 받은 사람은 안중근을 심층 수사한 통감부 경시 사카이 요시아키다. 그리고 사카이는 안중근이 꼽은 이토의 첫 번째 죄목, ‘을미사변’ 가담자였다. 이게 역사적 진실이다. 이제 본다.
통감부가 보낸 수사관, 사카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가 터졌다. 11월 18일 조선 통감부는 대한제국 내부 경무국 경시 사카이 요시아키(境喜明)를 중국으로 파견했다.(1909년 11월 18일 ‘황성신문’) 사카이는 한국어에 능했다. 2년 전인 1907년 순종 번역관에 임명되면서 계급도 경부에서 경시로 승진한 상태였다. 1909년 1월 순종 서북순행 때 번역관으로 수행하기도 했다.(1907년 음11월 28일, 1908년 음12월 30일 ‘승정원일기’)
사건이 터지자 일본 본국과 통감부 사이에 수사 주도권을 잡기 위해 암투가 벌어졌다. 통감부는 고종을 비롯한 국내 세력을 엮어서 통감부 주도 병합을 앞당기려고 했다. 통감부는 ‘일거에 병합을 단행하기 위해 무리하게라도 증거를 만들 것을 건의하고’ 자체 수사관을 파견했다.(당시 일본 외무성 정무국장 구라치 데츠키치, ‘한국병합의 경위’, 외무성 조사부 제4과, 1939, pp.26~28)
이를 위해 파견된 사람이 사카이 요시아키다. 하지만 사카이는 물론 함께 파견된 조선주차군 헌병장교도 ‘배후 없는 안중근 일행 단독 범행’으로 결론을 냈다. 그리고 안중근은 서울로 복귀한 사카이에게 ‘사군천리’ 시를 써서 보냈다.
‘사군천리’ 그리고 사카이
‘하루는 경성에 있는 모씨 소감을 물으니 안중근이 붓을 잡고 “사군천리~”라고 써서 모씨에게 보냈다.’ 안중근 사형 선고 후 20일 정도 지난 1910년 3월 4일 일본계 ‘조선신문’에 실린 기사다. 기사가 이어진다. ‘모씨 이에 대해 ‘大悟語能(대오어능)~’이라는 시를 적어 안에게 보냈다고 한다.’(1910년 3월 4일 ‘조선신문’) 아래는 그 시다.
大悟語能得入<玄>/只應神助就安<眠>/乞爾臨死休憂國/永古東洋有善<憐>
그런데 안중근의사기념관 광장에 이런 시가 새겨져 있다.
‘東洋大勢思杳<玄>/有志男兒豈安<眠>/和局未成猶慷慨/政略不改眞可<憐>’
이 안중근의 시와 ‘경성 모씨’가 보낸 답시는 운(韻·꺾쇠 부분)이 정확하게 일치한다.(도진순, 앞 논문) 광장 비석에 삭제된 글자가 있다. 원본 사진에는 이 시를 ‘贈仙境先生’, ‘선경 선생에게 준다’라고 적혀 있다. 경성 모씨 이름은 ‘선경’이다. 안중근 자서전 ‘안응칠역사’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내무부 경시인 일본인 선경(仙境)씨가 왔는데 한국말에 매우 능통해 날마다 서로 만나 얘기를 나눴다.’(안중근평화연구원, ‘안중근자료집’1, 채륜, 2016, p448)
안중근은 바로 사카이를 선경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사군천리’에 나오는 ‘군(君)’은 ‘대한의군을 만들었다는 고종’이 아니라 통감부 경찰 사카이 요시아키다.
이제 악연 시작.
을미사변, 사카이 마쓰타로(境益太郞)
사카이 요시아키 본명은 사카이 마쓰타로(境益太郞)다. 1868년 9월생이다. 경성에 있는 일본 영사관 순사로 있던 1895년 4월, 마쓰타로는 이봉운이라는 조선 학자와 함께 ‘일화조준’이라는 조선어 교재를 만들었다. 판권지에 있는 마쓰타로 주소는 나가사키현 미나미다카키군(南高來郡) 고지로촌(神代村)이다.
출판 6개월 뒤인 그해 10월 7일 밤 마쓰타로는 을미사변에 참여했다. 당시 ‘한성신보’ 편집인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에 따르면, ‘영사관 (警部, 경시 아래 계급) 오기하라 히데지로(荻原秀次郎)는 미우라 공사 지시로 사카이 마쓰타로를 비롯한 순사들을 소집해 사복을 입혀 용산으로 떠나게 했고’ 이들은 ‘괴이하고 난잡한 난동 폭도처럼 몰려가서 사변을 일으켰다.’(고바야카와 히데오, ‘민비시해기[閔后殂擊事件]’, 조덕송 역, 범문사, 1965, pp.62,70)
날이 밝았을 때 ‘흰옷에 혈흔이 완연한 채 영사관에 복귀하는’ 마쓰타로가 목격됐다.(1895년 11월 22일 우치다 일등영사 증인신문. 이치카와 마사아키(市川正明), ‘일한외교사료5 한국왕비살해사건’, 한국학진흥원, 1985, p236) 석 달 뒤인 1896년 1월 21일 이들은 히로시마지방재판소에서 모두 방면됐다. 이유는 ‘증거불충분’.
사카이 요시아키, 사카이 마쓰타로
풀려난 영사관 소속 순사들은 속속 조선으로 복귀했다. 가담했던 영사관 경찰 8명 가운데 6명은 조선으로 복귀했다. 경부 오기하라 히데지로(荻原秀次郎)는 상해와 부산 경찰서장을 지냈다. 오타 히데지로(太田秀次郎)로 개명하고 부산에 살다가 죽었다. 사카이 요시아키는 와타나베 타카지로(渡辺鷹次郎), 요쿠 유지로(横尾勇次郎), 시라이시 요시타로(白石由太郎)와 함께 경성 영사관으로 복귀했다. 오타 토시미츠(小田俊光)는 통감부(이사청) 순사로 복귀했다. 키노와키 요시노리(木脇祐則)는 대만총독부 지방경찰서장으로 일했다.(이상 ‘통감부 공보’ 28호,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0권, 14권, ‘臺灣總督府檔案’ 등) 확인하지 못한 나루세 기시로(成瀬喜四郎) 1명을 제외한 모든 경찰 가담자들 이후 행적이다.
국사편찬위에 있는 ‘주한일본공사관 기록’을 종합하면 사카이 마쓰타로는 원산영사관(1896), 인천영사관(1898), 부산경찰서(1899), 목포영사관(1900)에 근무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15, 8-1-2-(56)1900년 9월 21일 활빈당 체포자의 진술에 관한 건 등) 목포영사관 마산출장소에 파견돼 일본 거주지를 건설하고 마산경찰서장으로 일했다. 계급은 경시보다 아래 경부(警部)였다.
1904년 사카이 마쓰타로는 조선인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해 죽을 위기를 넘겼다. 그때 마쓰타로(益太郞)에서 요시아키(喜明)로 개명했다.(스와 시로, 국역 ‘마산항지(馬山港誌, 1910)’, 창원시정연구원 창원학연구센터, 2021, pp.127~129) ‘마산항지’에는 ‘益太郞’가 ‘喜太郞’로 잘못 적혀 있다.
사카이는 1908년 1월 1일 자로 대한제국 내부 번역관 겸 경부로 임명됐다. 임명과 함께 경시로 승진했고, 이듬해 순종의 북쪽 여행 때 호종했고, 여순으로 파견돼 안중근을 조사했다.
1917년 3월 경기도 경무부 경시 사카이 요시아키(喜明)가 퇴직했다. 귀국할 때 그가 밝힌 고향 주소는 ‘나가사키현 미나미다카키군(南高來郡) 고지로촌(神代村)’, 사카이 마쓰타로(益太郞) 주소와 동일했다.(1917년 2월 4일 ‘매일신보’)
여순 검찰과 통감부가 갈등관계였으니, 안중근이 여순 검찰에 ‘왕비 민씨를 죽인 이토를 처단했다’고 진술한 사실을 사카이는 몰랐을 것이다. 사카이가 ‘천리 밖’ 경성에 복귀한 날짜는 1910년 2월 10일이니, 전날인 2월 9일 오후 4시 무렵 공판정에서 안중근이 다시 한 번 왕비 민씨 진술을 한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안중근 또한 사카이가 왕비 민씨 살해사건 범인임을 알지 못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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