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부정조차 접어두고 고독과 싸웠던 김영삼과 김대중
물론 의혹일 뿐, 뇌물죄 여부는 법원의 판단으로 최종 결말이 날 것이다. 하지만 사법적 판단과는 별개로 국민적 의혹은 커질대로 커진 상태다. 이 사건은 대통령 재임 때부터 “언제 터져도 터질 뇌관”이란 설이 파다했다. 그러나 문 전 대통령은 사과도, 해명도 하지 않았다. 만일 그때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대해 엄정한 수사를 지시했다면, 그때 국민 앞에 나와 진솔하고도 명쾌한 해명을 내놓았다면 어땠을까. 지금쯤 의혹은 국민들 기억에서 사라졌을 것이고, 검찰 압수수색 영장에 문 전 대통령이 뇌물수수 혐의의 피의자로 적시되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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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S·DJ는 재임 중 아들들 구속 지시
“민심 지지 없인 국정 운영 어려워”
김건희 여사 의혹 해소·사과 없이
여소야대 헤쳐나갈 동력 못 얻어
」
민심의 용서를 받지 못하는 지도자는 국정을 이끌어갈 원동력을 상실하고 만다. 물론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도덕적 권위와 정치적 위상도 갖지 못한다. 대통령 재임 중 아들들을 구속하는 결단을 내렸던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이런 이치를 꿰뚫는 통찰과 혜안이 있었다. 퇴임을 1년여 앞둔 1997년 YS는 차남 현철씨가 한보 특혜대출 비리 사건의 배후라는 의혹이 제기되자 검찰총장을 불러 수사를 지시한다.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고 사과하고 “만일 제 자식이 이번 일에 책임질 일이 있다면 응분의 사법적 책임을 지도록 하겠다”고 했다. “처벌할 수 없다”는 검찰 보고를 받고 YS가 “혐의가 없다고 하면 국민이 믿겠느냐”며 무조건 구속을 지시한 건 널리 알려진 일화다.
2002년엔 DJ의 차남 김홍업씨와 3남 김홍걸씨의 비리 의혹이 터졌다. DJ는 미국 체류중이던 홍걸씨에게 부속실장을 보내 “조속히 귀국해 검찰 수사를 받으라”는 지시를 내린다. “유무죄, 억울함을 떠나 구속하지 않고는 국민 감정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참모들의 보고를 듣고 DJ는 한동안 침묵하다 “옥바라지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홍걸씨는 귀국 이틀 뒤, 홍업씨는 그 한 달 뒤 구속 수감됐다. 그날 아침, DJ는 “자식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책임을 통절하게 느껴왔으며, 국민 여러분께 마음의 상처를 드린 데 대해 부끄럽고 죄송한 심정”이라고 사과했다.
YS와 DJ가 비정한 아버지라서 그랬을까. 복수의 참모들에 따르면, “대통령을 빨리 끝냈으면 좋겠다” “하루도 더 청와대에 있고 싶지 않다”며 괴로운 심사를 토로했다고 한다. 그들도 결국 아버지였던 거다. 하지만 부정(父情)조차 접어둬야 하는 지독한 고독과 싸워야 하는 게 지도자의 숙명이다. “주변의 문제로 민심 이반과 정치 공방이 격해지면 국가적 과제를 해결할 동력을 잃게 된다”는 소명 의식 말이다.
추석 연휴다. 윤석열 대통령의 가족 문제가 추석 민심을 달구고 있다.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연루 의혹, 디올백 수수, 국정 개입 논란 등 김건희 여사 관련 의혹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가는데 무엇하나 말끔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명품백 사건은 비록 몰카 동영상이긴 하지만, 전 국민이 그 장면을 생생하게 목격한 사건이다. 국민권익위는 무혐의 처분을 내렸고, 담당 국장은 목숨을 끊었다. 검찰 수사에 이어 검찰수사심의위도 김 여사의 직무관련성·대가성이 없어 처벌할 수 없다며 불기소 권고를 했는데, 수사 과정에서 김 여사에 대한 출장·특혜 조사라는 또다른 시빗거리를 낳았다. 서울중앙지검이 검찰총장을 패싱한 채 제3의 장소에서 비공개 조사를 한 게 논란이 됐다. 석연치 않은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은 “저도 검사 시절에 전직 대통령 부인에 대해 자택까지 직접 찾아가 조사한 일이 있다”며 두둔했다. 특수부 검사 출신의 대통령이 법리상 형사 사건으로 기소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질 순 있겠다. 하지만 법리와 관행을 따지기에 앞서 국민 앞에 고개부터 숙이는 게 국민의 법 감정과 정서를 이해하는 지도자다운 태도일 것이다. “정치적 유불리만 따지지 않겠다” “쉬운 길을 가지 않겠다”는 윤 대통령의 말마따나 극한의 여소야대 국면을 헤쳐나갈 유일한 동력은 국민 지지 밖에 없지 않은가.
김 여사는 쪽방촌 도배 봉사, 119특수구조단 수난구조대 방문에 이어 추석 연휴에도 사회적 약자층을 위한 행보를 이어갈 것이라고 한다. 나무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메시지보다 메신저다. 변호인을 통해 언론에 공개된 “심려를 끼쳐 국민들에게 죄송하다”는 말로 사과를 한 것으로, 검찰의 불기소 결정으로 면죄부를 받은 것이라고 착각하는 게 아니길 바란다.
이정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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