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먹는 송편, 외국인들이 빚고 탈북민이 판다
추석 앞두고 야근하는
여수의 특별한 떡공장
송편 반죽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실내를 가득 채웠다. 추석을 앞둔 지난 6일 전남 여수의 한 떡 공장. 남자 직원들은 모시 잎과 섞여 초록색으로 변한 쌀가루 반죽을 잘라 기계에 넣느라 분주했다. 기계는 콩고물 넣은 반죽을 일정한 크기로 떼어 동그란 원판에 떨어뜨렸다. 이를 받아 여자 직원들이 반죽을 송편 모양으로 빠르게 빚어냈다. 완성된 송편은 기계로 찍어낸 것처럼 균일했다. 두 개씩 짝지은 모시 송편 봉지가 행진하듯 줄줄이 쏟아졌다.
그런데 여느 떡 공장과는 달랐다. “신짜오(Xin chào)!” 직원 5명 중 4명은 베트남, 1명은 몽골 사람이었다. 떡 반죽을 만들고, 송편을 빚는 전원이 외국인인 것이다. 놀라지 마시라. 이 공장 주인인 박은숙(45) 보드레모시떡송편(해오름푸드) 대표는 탈북민이다. “저는 북한에서, 직원들은 다 외국에서 왔지만 한국 토박이 못지않게 이쁜 송편을 빚는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빚고 탈북민이 판매하는 송편을 우리가 먹고 있는 셈이다.
◇명절을 즐기는 각자의 방법
외국인 노동자들도 저마다 고향을 떠올리며 송편을 빚는다고 했다. 떡 만드는 일은 노동 강도가 센 축에 속한다. 남자 직원들은 불린 쌀을 기계에 넣어 빻고, 큰 고무 대야에 담은 쌀가루를 반죽기에 넣는 작업을 반복했다. 모시 잎과 함께 갈린 쌀가루는 눈처럼 고왔지만 무게는 상당했다. 불린 쌀이나 빻은 쌀가루를 기계에 넣을 때마다 ‘흡’ 하는 기합 소리가 들렸다.
한쪽에서는 몸통만 한 칼로 모시 잎 섞인 초록색 반죽을 썰어냈다. 이렇게 썬 반죽을 기계에 넣으면 콩이나 팥 같은 소를 품은 동그란 반죽을 기계가 뱉어냈다. 여직원 3명이 기계 앞에 앉아 빚어내는 떡은 하루에 약 1만9000개. 송편이 6종, 찹쌀떡이 4종이다. 무게로 환산하면 1톤에 이른다.
추석 대목을 맞은 직원들은 한 달 전부터 오후 8~9시까지 야근을 하고 있었다. 퇴근 후 기숙사에서 기절하다시피 잠들었다가 다음 날 출근한다고. 한국인에 비해 체력이 약해 가끔 1~2시간 출근 시간을 늦추고 늦잠을 자면서 체력을 보충한다. 이들도 추석 명절만 기다리고 있었다. 송편을 다 빚고 나면 각자 연휴를 즐길 예정이기 때문이다.
몽골인 직원 엥헤 바야르(29)씨는 추석 명절 기간에 몽골로 휴가를 간다. 딸아이 돌잔치를 위해서다. 그는 “몽골에선 양고기를 구워 잔치를 한다”며 “빨리 딸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베트남 직원들은 각자 한국에서 여행을 즐길 계획이다. 짠 반 칸(29)씨는 “친구들과 광주에 놀러 갈 예정”이라고 했다. “베트남 음식을 먹을 거냐”고 묻자 진지한 표정으로 “구운 고기가 최고”라고 답했다. 베트남은 따로 추석 명절을 쇠지 않지만 녹두나 계란, 고기, 연꽃 씨로 속을 채운 ‘반 쭝투’라는 월병을 선물하고, 가족끼리 모여 전골 음식인 러우(Lẩu)를 먹는다.
“송편을 예쁘게 빚어야 예쁜 자식을 낳는다”는 말은 북한에서도 똑같다. 박은숙 대표는 “송편을 제일 예쁘게 빚는 직원은 베트남인 레 티 꾸이(19)씨”라고 귀띔했다. 이 공장에서 2년 넘게 일한 그는 송편 빚는 속도도 다른 직원보다 2배 빨랐다. 이번 추석에는 베트남 친구들과 전남 나주를 여행할 예정이라고 했다. 직원들은 기술을 배워 언젠가 고향에 한국식 송편 가게를 내겠다는 꿈도 키우고 있었다.
◇우리와 닮은 추석, 그리고 떡
북한에서도 추석은 ‘떡’으로 기억되는 명절이다. 박 대표는 한국에서 송편을 먹어보고 고향을 떠올렸다. 함경북도 청진 출신인 그는 굶주림을 피해 2008년 탈북했다. “북한에서도 명절이면 쌀을 아껴서라도 떡을 해먹어요. 쌀이 별로 없으니 크게 자란 쑥을 며칠간 물에 담가 독기를 빼낸 뒤 ‘풀떡’을 만들거나 콩만 몇 개 넣은 송편을 먹었습니다.” 명절이 아니면 먹을 일이 없기 때문에 떡은 언제나 먹고 싶은 음식 1순위였다. 김일성 사망 후 식량 배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떡은커녕 굶는 게 일상이었다고. “세뇌 교육이 어찌나 잘됐는지 ‘수령님이 돌아가시면 우리도 다 죽는 거 아냐’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못 먹어 죽게 생겼더라고요(웃음).”
그는 ‘돈을 벌어 굶주림을 벗어나겠다’라는 생각으로 2007년 육촌 친척들이 있는 중국 옌볜으로 향했다. 군인으로 퇴역한 아버지와 교사이던 어머니에겐 말도 꺼내지 않았다. 당에 대한 충성심이 높아 만류할 게 뻔했기 때문. 중국에서는 배고픔이 해결됐지만 언제 북송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이듬해 한국으로 건너왔다.
한국에서는 북한식 김치를 만들어 팔다가 북한에서 먹던 풀떡을 닮은 모시송편에 반해 업종을 전환했다. 그는 “풀떡과 비슷한 색인데 맛도 좋고 속도 편안하더라”며 “못 먹어 한이 맺혔던 떡을 원없이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20평 남짓한 가게에서 시작한 모시 송편이 소문을 타면서 올해 8월 120평 규모 떡 공장을 차렸다. 위험 요소들을 완전히 차단하고 생산해야 딸 수 있는 해썹(HACCP) 인증도 한국식품안전관리인증원에서 받았다. 그 사이 가맹점은 8개로 늘었다. 모시 농장도 운영한다.
◇北 가족 향한 그리움으로 빚는다
쌀을 아껴 겨우 만들어 먹던 떡은 이제 ‘밥줄’이 됐다. 떡을 판 돈으로 북한 식구들이 굶지 않게 돈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중국에 숨어 살 때는 안부조차 확인할 수 없던 가족 소식은 한국에 와서야 들을 수 있었다. 중국 전파가 잡히는 국경 지역으로 가족을 데려와 통화시켜준다는 말에 돈을 건넸지만 처음 연락이 닿은 사람은 엉뚱한 사람이었다. 그후로는 북한의 어머니와 통화를 하기 전에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우리 만의 추억’ 한 문장씩을 고민해 묻는다. “엄마, 예전에 이런 일 있었지?” 같은 공통 기억을 더듬어가며 신원을 확인하는 것이다. 코로나 이후 국경 경비가 강화되면서 통화조차 쉽지 않아진 탓에 최근엔 어머니 목소리를 녹음한 것만 전해 듣고 있다.
2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 임종을 지키지 못했지만 북한에 있는 가족을 위해 1년에 한두 번 돈을 보낸다. 어머니는 물론, 오빠네 가족과 얼마 전 결혼한 남동생 살림에 보탬이 될 거란 바람으로. “감정이 다 말라서, 일할 땐 북에 남겨둔 가족도 잊고 살아요”라는 말과 달리 박 대표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여기 와서 나 혼자 밥 먹고 사는 게 너무 죄스러워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어요.”
그의 소원은 탈북민끼리 모여 명절을 쇠는 공간을 만드는 것. 가족이 그리워지는 시기에 다 같이 모여 북한에서 먹던 콩 송편과 시래기를 잔뜩 넣은 순대를 만들어 먹는 것이다. 이곳이 탈북민들의 ‘친정’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공장 한쪽에 작은 쉼터를 만들었다.
올해는 탈북민을 지원하는 하나센터를 통해 목포와 여수 지역 탈북민 200명에게 떡 선물을 하기로 했다. “옛날엔 ‘통일만 되면 트럭에 한국 음식과 물건을 잔뜩 싣고 북한에 가서 가족들을 만나야지’라는 꿈을 꿨는데, 이제 꿈을 여기에 두고 살아요.” 한반도통일연합회에서 진행하는 멘토 프로그램으로 광주광역시에 탈북민이 운영하는 보드레모시떡송편 가맹점을 내기도 했다.
국내 탈북민은 3만4121명으로 70%가 10년 이상 거주한 사람들이다. 고향에 있는 가족을 보지 못한 세월도 그만큼 길다. 돈을 벌러 온 외국인 노동자들도 민족 대이동이 일어나는 추석엔 고국의 가족 생각을 한다. 당신이 먹는 송편에 이렇게 복잡하고 애틋한 사연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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