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선데이] 조선왕가는 우크라계 세자빈을 버렸지만…

2024. 9. 14.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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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창 전 주우크라이나 대사·한국수입협회 상근부회장
평민 여성이 왕자를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평민간의 결혼에서도 가문끼리의 문화적 충돌이 있다. 왕가와의 결혼이라면 그 충돌은 더욱 클 것이다. 영국의 유력한 귀족집안 출신이었던 다이애나비 조차도 왕가에 시집가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다이애나처럼 우리에게도 슬픈 세자빈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줄리아 멀록(Julia Mullock). 조선왕가의 마지막 세자빈이었던 이 신데렐라는 동화처럼 행복하진 못했다.

「 이구의 부인, 자식없자 강제 이혼
외교는 눈앞 아닌 장기 비즈니스
전후 복구, 자원, 잠재력 고려하면
한국, 전쟁 중인 우크라 계속 지원을

줄리아는 미국으로 간 우크라이나 출신 탄광노동 이민자의 딸이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 형편이 어려웠다. 미술학교를 마치고 뉴욕의 설계사무소에서 일하던 그녀는 막 입사한 8세 연하의 동양 청년에게 끌렸다. 당초 미술 공부를 하러 스페인 유학을 결정했지만, 서투른 우크라이나어를 배워 자신을 감동시킨 청년의 구애에 유학 대신 사랑을 택했다. 그 청년의 이름은 이구(李玖), 고종의 손자이자 영친왕의 아들이었다. 두 사람은 1959년 뉴욕의 우크라이나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상냥하고 성실한 세자빈은 시어머니 이방자 여사의 복지사업을 열심히 도와 장애아들로부터 ‘큰 어머니’로 불렸다. 그러나 대를 이을 자식을 낳지 못하자 푸른 눈의 외국인 세자빈을 못마땅해 하던 종친회는 이혼을 종용했고, 1982년 결국 강제로 이혼시켰다. 이혼 후에도 한국을 떠나고 싶지 않던 줄리아는 서울에서 공예점을 운영하며 장애인복지사업에 힘썼다. 그녀는 남편을 “쿠(이구의 영문이름 Ku Lee)”라 불렀다. 항상 남편을 그리워하며 그의 편지를 기다리던 그녀는 남편 생전에 “꼭 쿠를 다시 만나 ‘나와 헤어진 후 행복했나요?’라고 묻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다. 2005년 남편이 도쿄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오열했다. 하지만 장례식에 초대받지 못한 채 종로의 군중 틈에서 남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그녀는 2017년 하와이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자기 유해의 일부라도 한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유해는 태평양에 뿌려졌다.

줄리아는 한국과 남편을 사랑했지만, 조선 왕가는 이 우크라이나 핏줄의 세자빈을 버렸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해 온 우리 정부도 우크라이나를 계속 도와야 할지, 아니면 버려야 할지를 놓고 어려운 선택에 직면하게 될 수 있다. 변수는 두 가지, 전황과 미국 대선 결과다.

먼저 전황을 보자. 우크라이나 군이 러시아 본토를 급습하여 성과를 냈지만, 우크라이나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가 공세에 나서고 있다. 전황은 병력, 무기 등에서 우세한 러시아에게 유리하다. 장기전에서는 상대보다 자원을 더 오래 동원하는 쪽이 이긴다. 우크라이나의 패배가 뚜렷해지면 패전국에 대한 대규모 지원은 자원의 낭비로 보일 것이다. 외교는 감정을 배제하고 국가이익을 따라 움직인다. 우리가 우크라이나를 계속 지원하는 것이 국익에 맞는지 의문이 제기될 것이다.

미국 대선도 큰 변수다. 해리스는 바이든의 외교정책을 계승해 우크라이나를 계속 지원할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다르다. 그는 양국을 압박해 협상테이블로 나오게 하고, 우크라이나에게 러시아가 점령중인 영토를 포기하라고 할 것이다. 여기에 반대하면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끊을 것이다. 미국이 손을 뗄 경우, 유럽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동맹국들도 대 우크라이나 지원여부를 두고 딜레마에 빠질 것이다. 미국이 지원을 끊는다면 동맹국인 우리도 동참해야 할지 논란이 될 것이다.

이런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크라이나의 자원, 성장 잠재력과 우리의 지원 공약을 고려하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는 게 맞다. 그간 해온 것처럼 인도적 지원과 복구·재건을 중심으로 하는 지원이다. 이것은 우리 기업들의 전후 재건사업 참여로 이어지기에 국익에도 부합한다. 전쟁이 끝나도 서방과 러시아의 관계는 전쟁 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전쟁 후에도 자유민주주의, 인권 등의 가치를 공유하는 서방과 연대하고, 나토와의 협력도 강화해나가야 한다. 우리의 안보를 위해서다.

외교는 장기적인 비즈니스다. 눈앞의 손익을 넘어 국제사회에서의 우리의 위상과 신뢰도를 위해서도 우크라이나 지원은 필요하다. 한국을 사랑했던 줄리아처럼 우크라이나도 우리와 함께 가고 싶어 한다. 조선 왕가는 우크라이나 세자빈을 버렸지만, 우리가 다시 우크라이나를 버리는 일은 결코 없기를 바란다.

권기창 전 주우크라이나 대사·한국수입협회 상근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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