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카와 아야의 시사일본어] 레이와의 쌀 소동
사실 쌀 부족을 강조하는 보도가 사재기를 부추긴 측면도 있다. 쌀을 아끼려고 우동이나 파스타 등 면 종류를 먹고 지내는 사람들도 많다. 매달 한·일을 왕래하는 나는 한국에서 쌀을 가져갈까 고민하기도 했다.
‘레이와’는 2019년을 원년으로 하는 일본의 연호다. 그 전의 연호는 ‘헤이세이’였는데 ‘헤이세이의 쌀 소동’도 있다. 1993년의 일이다. 이때는 이상기후로 기온이 낮아져서 쌀 생산량이 급감했다. 태국과 미국에서 쌀을 긴급 수입했는데 그때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처음으로 태국 쌀을 먹고 일본 쌀과 전혀 달라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일본 정부가 쌀 소비량이 줄어들 것을 예상하고 생산 억제 정책을 추진해온 탓이라는 지적도 있다. 정부에 대한 불만이 커진 또 하나의 요인은 비축미를 풀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는 쌀 가격 하락을 우려해 100만t 가까이 되는 비축미를 풀지 않고 있다. 요시무라 히로후미 오사카부 지사가 비축미 방출을 정부에 요구하면서 주목받았는데, 정부는 “곧 수확될 쌀이 시장에 나올 것”이라며 국민에게 차분한 대응을 요청했다.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비축미를 풀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비축미 제도가 시작한 계기는 바로 ‘헤이세이의 쌀 소동’이다. 그런데 그냥 ‘쌀 소동’이라고 하면 헤이세이보다 훨씬 이전인 1918년의 쌀 소동을 가리킨다. 상인들이 투기 목적으로 쌀을 사들여 쌀 가격이 급등해, 생활고에 시달린 서민들이 폭동을 일으킨 사건이다. 폭동은 전국으로 확산되고 경찰과 군대가 진압에 나섰다.
이때 조직화된 것이 자경단이다.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경비 단체로 쌀 소동 진압에 협조했다. 그런데 그 다음해 간토 대지진이 일어나고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등의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조선인 학살에 앞장선 것도 자경단이었다.
지진과 쌀 소동. 일본은 현재 지극히 불안한 상황이다. 곧 탄생하는 새로운 총리는 좀 더 여론에 귀를 기울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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