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 놀고 저녁밥 먹어” 더는 불러 줄 사람 없네
[박준의 마음 쓰기] (11)
라디오 주파수를 이리저리 빠르게 돌려볼 때가 있습니다. 정체와 지체가 이어지는 길을 운전할 때 제가 무료함을 견디는 방법입니다. 그러다 좋은 음악이 흘러나오면 반가운 마음으로 버튼에서 손을 뗍니다. 어제는 밴드 혁오의 ‘와리가리’라는 곡을 들었습니다. “그런 슬픈 말을 하지 마요/ 아마 그럴 줄은 알았는데/ 이젠 좀 잔잔하다 했었는데/ 뒤도 돌아보지 않아/ 그런 마음을 낮추지 마요”라 시작되는 첫 소절부터 따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마냥 좋아하는 곡이 됐지만 사실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의아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노래 제목이 낯설면서도 동시에 낯익었던 것입니다. 와리가리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등록되지 않은 낱말입니다. 언뜻 일본어에서 온 듯도 하지만 명확한 유래를 찾을 수 없습니다. 왔다갔다, 혹은 구어적으로 왔다리 갔다리 하고 말하는 것의 변형으로 생각되지만 제 추측일 뿐입니다. 이렇게 뜻도 명확하지 않은 와리가리라는 말이 익숙한 까닭은 어려서 친구들과 즐겨 하던 놀이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가볍고 말랑말랑한 공을 준비합니다. 스포츠 용품점에서 판매하는 정구공이라면 더없이 좋겠지만 학교 앞 문구점에서 흔히 파는 고무공이어도 무방합니다. 수비팀의 두 사람은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힘껏 공을 던져 주고받습니다. 이때 공격팀은 홈베이스에서 대기하다 적당한 틈을 노려 약속한 지점까지 빠르게 나아갔다 돌아와야 합니다. 물론 달리는 도중 수비수가 던진 공에 맞거나 직접 태그를 당하면 아웃으로 처리됩니다. 반대로 수비수가 잡기 전에 공중에 뜬 공을 주먹으로 쳐서 멀리 보내거나 나를 향해 날아오는 공을 재빠르게 피할 수 있다면 신나게 뛰면서 대량 득점을 올릴 수 있습니다.
이 놀이의 미덕은 경쟁에 목을 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직 달리기가 느린 서너 살 아래의 동생을 심판으로 세워두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정작 중차대한 역할을 맡은 심판은 점수를 셈하고 기록하는 대신 딴짓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혹여 엎치락뒤치락 접전이 펼쳐지는 경기라 하더라도 의외로 싱겁게 끝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해 질 녘이면 공터나 운동장으로 형·누나들이 찾아와 양이나 염소를 몰 듯 놀이를 하던 친구들을 하나 둘 집으로 끌고 갔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숨이 가쁩니다. 마치 어릴 적 와리가리 놀이를 하듯 여전히 분주하게 몸과 마음을 옮기며 살아갑니다. 아침저녁으로 일터와 집을 오가고, 구름 같은 기대와 허공 같은 실망을 반복하며, 어제의 고민에서 오늘의 고민으로 새로 내딛는 것입니다. 한 가지 슬픈 일은 이제 말랑말랑한 공이 아니라 필요와 대가와 당위와 의무만을 의식하며 뛴다는 것입니다. 자연히 과정의 순수한 즐거움을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슬픈 일이 또 있습니다. “이제 그만하고 와서 저녁밥 먹어”하며 내 걸음을 쉬게 해줄 이가 이제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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