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가을, 일상의 쉼표 되어줄 추석 연휴 8인의 추천 책

이영희.홍지유 2024. 9. 14.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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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다가왔는데 더위가 식을 줄 모른다. 힘들고 고된 여름을 견딘 당신에게 짧지 않은 명절 연휴와 이 가을에 벗이 되어줄 책 여덟 권을 권한다. 서로 하는 일은 달라도 읽고 쓰는 일에 애정이 남다른 이들이 한 권씩 골랐다.


일상을 벗어난 공간이 주는 깨달음
박상현 오터레터 발행인

추석은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게 정석이겠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떨어져서 조용한 나만의 시간을 갖거나 여행을 한다. 한 도시 문헌학자는 도시를 탐사하기에 가장 좋은 때가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명절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번 추석에는 조성익 건축가가 쓴 『건축가의 공간 일기』를 읽어 보면 어떨까?

저자가 해외의 뛰어난 건축물을 방문하고 받은 인상을 적은 글이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곳에서 느낀 감흥을 느낄 수 있는, 혹은 함께 살펴보면 좋을 한국의 장소들을 함께 들려주는 일종의 페어링(pairing)을 한다. 서울 양화진의 외국 선교사 묘원부터 홍은동의 베이글 맛집, 심지어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마이너리그 야구장까지 돌아다니며 자신이 그 공간을 사랑하는 이유를 조용한 말투로 들려주는데, 내가 아직 가 보지 못한 곳임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읽게 된다.

건축가의 공간 일기
하지만 조성익은 이 책에서 건물의 뛰어난 설계보다는 그 장소에서 찾아오는 깨달음을 얻는 법을 이야기한다. 그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표현을 빌려 ‘에피퍼니(epiphany)’라는 이런 깨달음이 “일상 공간의 평범함에서는 약간 벗어나 있는, 그러나 너무 특별하지 않은 공간”에서 찾아온다고 한다. 우리를 압도하는 유명한 건물은 오히려 우리가 차분하게 생각할 기회를 허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번 추석에는 사람들이 떠난 도시를 거닐며 나만의 에피퍼니를 기다려 보시기 바란다.

삶의 멈춤 신호, 긴 호흡의 여행으로
하지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건국대 교수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를 고우영 만화로 읽던 초등학생은 매일 밤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잠이 들었다. 어른이 돼서는 한 방향으로 일 년간 무제한 탈 수 있는 비행 티켓을 버킷 리스트로 삼았지만 현실의 의무가 로망을 이기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버렸다.

언젠가는 해봐야지 하던 것을 독특한 방식으로 해치워버린 사람이 있다. 비행기를 타지 않고 배와 기차, 자동차로만 하는 ‘노플라잇 세계여행’이다. 40대의 저자는 회사를 그만두고 중국 칭다오로 여객선을 타고 넘어가는 것을 시작으로 미국의 시애틀까지 111일 동안 여행했다.

중국에서는 고속기차로 이동하고, 충칭에서 우루무치까지는 33시간의 침대기차를, 튀르키예에서 유럽으로 넘어갈 때는 여객선, 그리고 이탈리아 로마에서 크루즈선을 타고 2주에 걸쳐 미국 플로리다로, 이후엔 머스탱 컨버터블로 시애틀까지 갔다. 인천까지는 아쉽지만 비행기로 귀국.

노플라잇 세계여행
나도 해볼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여정이지만 우여곡절이 많았다. ATM기가 카드를 먹어버리기도 하고, 기차를 놓친 후엔 중국의 명절로 발이 묶인다. 스페이스X의 발사를 며칠을 기다려 관람하고, 미국의 핵미사일 발사기지를 찾아가는 등, 일반적 여행코스라면 포함하기 어려운 곳도 들른다. 개인 여행의 묘미다.

불혹의 어른이 견문이 넓어질 것이 뭐가 있을까 싶지만 저자는 습관과 문화의 차이를 인식하며 여유가 생기고, 일과 직업에 대한 고민도 새로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삶의 한 고비에 자의 반 타의 반 멈춤의 신호가 주어진다. 이때 긴 호흡의 여행, 한 번 질러 볼 가치가 충분하지 않을까.


지금 우울의 늪을 건너는 당신에게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보통”의 한국인이라면 추석에 우울해지기 쉽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지만, 자기 일터에서 탐스러운 수확물이 있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뿐인가. 자기 땅이 아니라 남의 땅을 경작해주는 소작인일 수도 있고, 경작지 자체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니 수확의 계절이라며 기뻐 날뛸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오랜만에 가족과 친지를 만나니 흥겹지 않겠냐고? 웹툰 ‘집이 없어’가 생생하게 묘사했듯이, 현대 한국의 상당수 가족은 한가롭게 흥겨움을 느낄 상태가 아니다. 피치 못해 마주한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산 사람과 산 사람 사이에는 함께 나눌 흥겨움보다는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묵은 감정이 고여 있다. 함께 모여 추석의 예식을 거행하다 보면, 희미해졌던 권력관계가 새삼 고개를 든다. 누가 먼저 절하고, 누가 먼저 먹고, 누가 먼저 상을 치우고, 누가 먼저 설거지를 할 것인가. 이 순서는 곧 권력의 순서다.

고쳐 쓰는 마음
명절은 여느 때보다 더 흥겨워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있는데, 그 요구에 부응할 처지가 못되면 흥겨움은 이제 숙제가 된다. 밀린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흥겨움을 연기하다 보면, 삶의 우울이 엄습한다. 마치 흥행에 실패한 배우가 된 것처럼. 이런 이들에게 이윤주의 신작 에세이집 『고쳐 쓰는 마음』을 권한다. 이 책은 어느 날 마음을 습격한 우울증에 대한 인류학적 기록이자, 파괴된 마음을 재건하려는 이에게 처방된 활자로 된 진통제다.

이 간절함이 모여 눈부신 기도 되다
정여울 작가, KBS ‘정여울의 도서관’ 진행자
종교가 없는 사람에게도 기도가 간절할 때가 있다. 사실 힘겨운 매일의 삶이 ‘기도가 필요한 간절함’의 연속이다. 내게 신앙에 기대지 않고도 충분히 아름다운 기도가 가능함을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이문재 시인이다.

『당신의 그림자 안에서 빛나게 하소서』에 갈무리된 아름다운 시편들은, 저마다의 간절함이 모여 비로소 눈부신 기도로 승화하는 순간들을 불꽃놀이처럼 찬란하게 보여준다. “나는 소망합니다. 상대가 나에게 베푸는 사랑이 내가 그에게 베푸는 사랑의 기준이 되지 않기를.”(헨리 나우웬)

당신의 그림자 안에서 빛나게 하소서
이문재의 ‘오래된 기도’는 기도의 모든 장벽을 허물어뜨린다.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솔숲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기울이기만 해도/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라고.

조은의 ‘동질’은 생면부지의 타인이 보낸 잘못된 문자메시지가 애타게 응답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챈다. “이른 아침 문자 메시지가 온다./-나지금입사시험보러가잘보라고해줘너의그말이꼭필요해” 모르는 사람의 메시지임이 분명하지만 시 속의 ‘나’는 그 절박함의 온도를 알아채고 답장을 보낸다. “시험꼭잘보세요행운을빕니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도,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간절함을 알아보는 따스한 감수성을 잃지 않기를. 세상 모든 아픔은 당신의 간절한 기도를 필요로 하기에. 세상 모든 사랑은 간절한 기도를 닮았기에.


한 사람, 네 인생, 그리고 폴 오스터
임형남 건축가, ‘가온건축’ 대표
지난봄, 우연히 서점에 들렀다가 두 권으로 된 1500쪽 분량의 『4321』이라는 폴 오스터의 신간 소설이 있어서 집어 들었다.

폴 오스터의 소설은 휘발성이 강한 액체 같다. 문장이 차갑고 거침없이 흘러가 몰입하게 되는데, 이상하게도 책을 덮으면 그 낱말과 문장들은 날아가 버리고 차가운 느낌만 남는다. 변변치 않은 내 기억력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도시적이며 ‘하드보일드’한 폴 오스터만의 독특한 세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4321
『4321』은 뒤섞어 펼쳐놓은 4편의 소설이고 4개의 인생 이야기이다. 4명의 주인공은 사실은 모두 퍼거슨이라는 한 남자이고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도 모두 동일하다. 그러나 각자의 역할과 상황이 다르며, 이번에도 역시 배경은 미국 뉴욕이다. 그 안에서 퍼거슨은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며, 그가 죽거나 살아남아서 엮어내는 이야기가 빨리 돌리는 영화 필름처럼 펼쳐진다.

이야기들이 마구 섞여서 나는 도표를 만들어 구조적으로 이해하며 읽어야 했다. 이야기의 미로 속에서 헤매다 보니 문득 출구가 나오고 소설은 끝난다. 마치 마른 잎이 나뒹구는 11월 말의 뉴욕이나 브루클린의 어느 뒷골목으로 불쑥 나온 느낌이었다.

책을 덮고 이틀 후 소설가 폴 오스터의 부고를 들었다. 마치 그의 소설이 연장되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이야기와 더불어 폴 오스터 자체가 증발하였다.


감히 질투할 수 없는 아름다운 산문
신형철 서울대 영문과 교수
내가 고른 이 얇고 가벼운 책의 저자는 2020년 『시와 산책』이라는 무덤덤한 제목의 책과 함께 출판계에 나타났다. 나는 그 책을 읽고 놀랐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도 놀란다.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지금도 잘 모른다.

책의 제목은 이 글에서 왔다. “여름은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이다. 세 번을 거쳐온 마음은 미약하다. 그래도 싫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 한껏 사랑할 수 없다면 조금 사랑하면 되지.(중략) 우주의 빛을 소리로 변환하는 기술에 대해 들어본 적 있다. 여름의 빛이 매미 소리로 변신했다고 상상한 그날로부터, 그 소리가 환호성으로 들리고 있다.”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
우리는 비판할 때 쓰는 똑똑한 어휘는 많이 가졌지만 찬탄할 땐 적당한 어휘가 없어 허둥댄다. 한정원의 산문을 두고 ‘아름답다’라고 적어봤자 한심해질 뿐이다. 예술의 여러 가치 중에 심미적 가치가 이만큼 결연한 산문을 만나긴 정말 어렵다. 옛 개념으로 말하면 언어 그 자체가 전경화(前景化)돼 있는 글. 그걸 돌에 새긴 걸 보듯 읽게 된다.

문장 만으론 문장이 안 된다. 문장은 마음이 찍어내는 것이니까. “예전처럼 사람들을 돕고 살지 못하는 것, 그것이 늘 내 마음의 짐이다.” 이렇게 말하는 마음 말이다. 그가 동물을 구하고 동물로부터 구해지는 이야기를 읽을 땐 온몸이 긴장된다. 나는 사람들이 그의 문장만큼이나 그 마음의 깊이를 질투했으면 좋겠다. 나는 감히 질투도 못 한다.


전기 없는 세상, 문명 붕괴 살아남기
김미옥 서평가
데이비드 켑의 『오로라』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전기로 이룩한 인류의 문명이란 자연재해 앞에서 얼마나 취약한 것인가. 소설의 배경은 태양에서 발생한 지자기 폭풍으로 인해 전 세계 전력망이 순식간에 붕괴하는 재난 상황이다. 지구는 암흑 속으로 빠져들고, 현대 문명은 완전히 마비된다. 전력망 붕괴 후 가족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주인공과 재난 해결을 위해 분투하는 과학자들의 활동이 펼쳐지지만, 이들에게 생존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오로라
소설 『오로라』는 전기 문명의 혜택이 인간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는 경고와 더불어 인간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깊이 있게 다룬다. 혼돈 속 다양한 인간 군상의 이야기는 팬데믹 시대의 불안감과 함께 현대 문명의 취약성, 인간 본성을 돌아보게 한다. 공기처럼 당연하게 생각했던 전기 의존의 현대사회가 자연 앞에 얼마나 무력한지, 전기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상당한 깊이의 생각을 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데이비드 켑은 할리우드 스토리텔링의 귀재다. 그는 우리에게 ‘쥬라기 공원’ ‘스파이더맨’ ‘미션 임파서블’ 등의 시나리오 작가로 익숙한 인물이다. 스티븐 킹은 이 책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읽히는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소설 『오로라』도 블록버스터 대작으로 만들어질 것 같다. 읽는 재미와 더불어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 추석 연휴는 『오로라』다.


논쟁 넘어 갈등 해소할 열 가지 기술
이정모 전 국립과천과학관장
경계를 두지 않고 학문과 학문을 연결하여 새로운 안목으로 시너지를 창출하는 과정을 통섭이라고 한다. 생태학자이자 동물행동학자인 최재천 교수가 사회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의 책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고심 끝에 만들어낸 말이다. 통섭은 단순히 합치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을 탄생시키는 과정이다. 통섭은 한국 사회에게 새로운 통찰의 기회를 주었다.
숙론
최재천은 이번에는 숙론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했다. 숙론은 논쟁과 토론을 넘어서는 심각한 토론을 말한다. 키워드만 제시한 게 아니다. 이념, 지역, 계층, 남녀, 세대, 환경 등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다양한 갈등을 분석하고, 이러한 갈등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지 다양한 사례를 소개한다. 숙론은 어렵다. 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와 실험이 이미 있었다. 여기까지 오면 숙론이 답처럼 보인다. 그런데 실제로 숙론은 성공적일까? 최재천은 말만 던지는 이가 아니다. 부분적이든 전체적이든 성공한 사례를 자세히 소개하고, 바람직한 숙론을 이끄는 열 가지 기술을 제시한다.

우리 교육은 점진적 진화를 기대할 게 아니라 과감한 혁명을 도모해야 할 때다. 서울 시민은 10월에는 교육감 선거를 치러야 한다. 어떤 후보를 골라야 우리 아이들이 숙론을 배우고 연습할 기회를 가질 것인가? 최재천 교수의 숙론은 꽤 긴 추석 연휴를 알차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책이다. 모든 시민들이 읽고 익히자.

이영희·홍지유 기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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