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위한 음악 만들리라, 삶의 마지막 불태운 스메타나

2024. 9. 14.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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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이미 오래전에 사망한 작곡가들의 음악을 주로 소비하다 보니 딱히 새로운 게 없어서 그럴까. 다른 분야에 비해 유독 클래식 음악계는 작가들의 생몰 연도가 중요한 이벤트가 된다. 그래서 한해 한해가 대개 누군가의 탄생 몇 주년이거나 누군가의 사망 몇 주년으로 기념되고 꾸려진다. 작년에는 브람스 탄생 190주년과 라흐마니노프 탄생 150주년으로 바빴고 올해는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탄생 200주년이다. 스메타나의 조국 체코는 물론이고 세계 곳곳에서 그의 삶과 음악에 관심이 모아진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도 예외는 아니다. 신년음악회와 함께 세계적인 빈 필하모닉의 대표적인 음악 축제인 쇤부른 궁전의 여름밤 콘서트에서도 스메타나의 인생 최고작 ‘블타바’를 비롯해 오페라 ‘팔려간 신부’와 ‘두 과부’의 춤곡들을 연주했다. 체코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시절,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오스트리아와 맞서 싸웠던 민족주의 작곡가 스메타나. 세월이 흘러 그 제국의 심장부에서 그의 탄생 200주년 기념공연을 하게 되다니 아이러니하면서도 감동적이다.

체코 혁명 주도 보로프스키와 절친
보헤미아 의 민족주의 작곡가 스메타나. 탄생 200주년을 맞았다. [사진 사회평론]
체코의 전신인 보헤미아 왕국은 역대 왕들이 종종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고 한때 제국의 황실이 왕국의 수도 프라하에 있었을 정도로 번영했으나, 19세기 초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합병된 이후에는 변방의 위치로 전락했다. 보헤미아의 고유문화 역시 점점 설 땅을 잃어가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독일인들의 이민이 이어지면서 일반인들은 물론 왕실에서도 체코어 대신 독일어를 더 많이 사용하게 되었고, 스메타나도 어려서부터 독일어를 말하며 자랐다.

그러던 그가 10대가 되면서 민족의식이 마음에 싹트기 시작한다. 훗날 체코 혁명을 주도하는 시인 카렐 하블리체크 보로프스키와 절친으로 지낸 영향이 컸으리라. 15살의 스메타나가 홀로 프라하로 유학을 떠날 용기를 낼 수 있던 것도 한해 앞서 프라하로 떠난 보로프스키 덕분이었다. 프라하에서 스메타나는 체코 민족 부흥 운동의 지도적인 인물인 요세프 융만이 가르치는 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1848년. 유럽에 군주제의 전복을 요구하는 혁명의 물결이 일자 프라하에서는 보로프스키가 주동이 되어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봉기를 일으켰고, 스메타나도 이에 적극 가담했다. 시민군과 프라하대학 학도군들을 위해 애국심을 고취하는 저항 음악을 작곡해가면서.

하지만 철저한 준비 없이 감행된 프라하 봉기는 오스트리아 정규군에 의해 빠르게 진압되면서 처참한 실패로 끝나버렸다. 그리고 보로프스키를 포함한 혁명 주도자들이 모두 투옥되거나 추방당하게 된다. 정치적인 희망을 잃어버린 스메타나는 상실감을 품은 채 피아니스트로서 연주 활동을 재개했다. 허약한 체질 탓에 강렬한 연주를 펼치지는 못했지만, 쇼팽 스타일의 섬세한 연주자로서 인정을 받았다. 생계를 위해 음악 학교도 열었다. 처음에는 12명의 학생으로 작게 시작했으나 민족주의자들의 전폭적인 지지 덕에 빠르게 기틀을 잡았다. 경제적으로 안정을 얻자 사랑하던 카체리나 콜라르조바와 결혼을 했고, 부부는 네 명의 딸을 낳았다.

한편 스메타나는 점점 연주보다 작곡에 대한 열정이 커졌고 적지 않은 작품들을 썼다. 그러나 2년간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그의 첫 교향곡은 정치적인 이유로 공연이 거부되고 말았다. 게다가 2년 동안 어린 딸이 셋이나 연달아 사망하고 죽마고우이자 혁명 동지였던 보로프스키까지 망명지에서 세상을 떠나 스메타나는 큰 아픔을 겪어야 했다. 더욱이 정치적 상황은 더 나빠졌다. 전제적인 알렉산더 폰 바흐 남작이 보헤미아를 통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망한 스메타나는 스웨덴 예테보리로 거처를 옮겼다.

보헤미아의 민속춤을 등장시켜 민족 정체성을 구현한 오페라 ‘팔려간 신부’ 일러스트 표지. [사진 사회평론]
1861년. 5년 만에 체코로 돌아온 스메타나의 이목을 끈 것은 프라하에 국립 오페라 극장이 설립된다는 소식이었다. 프라하는 빈에 앞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 흥행하고 ‘마술피리’를 초연했을 정도로 오페라를 사랑하는 음악 도시였으나, 아직 체코 작곡가가 만든 체코어 오페라가 나온 적은 없었다. 스메타나는 오페라야말로 체코의 민족 정체성을 구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음악 장르라고 생각했다. 극음악인 오페라는 연극적 서사가 있을 뿐 아니라 무대 장치와 의상 등을 통해서도 국가적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조국의 음악을 만들겠다는 사명감으로 돌아왔지만, 음악계는 스메타나를 거부한다. 자신들의 기득권이 흔들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진정한 이유였겠으나 겉으로는 스메타나가 리스트와 너무 긴밀하게 교류했었다는 것을 문제 삼았다. 그들에 따르면 스메타나 역시 리스트와 바그너처럼 위험한 진보주의자라는 것이다. 스메타나는 오직 실력으로 모든 난관을 돌파하기로 한다. 먼저 그는 완벽한 체코의 오페라를 만들기 위해 미숙했던 체코어를 문법부터 다시 배웠다. 그러한 노력에 대한 보상일까. ‘브란덴부르크 사람들’이 얀 폰 하라흐 백작이 주최한 체코 오페라 공모전에 당선된다. 그리고 같은 해에 나온 희극 오페라 ‘팔려간 신부’는 전대미문의 성공을 거두며 그에게 커다란 명성을 안겨다 주었다.

그의 성공은 체코 오페라라는 선례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그가 만들어 낸 체코 음악의 기적 같은 쾌거였다. 스메타나 오페라가 특별한 점은 다른 오페라들과 같은 아리아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민족성을 드러내기에 가장 손쉬운 수단으로 사용되던 전통적인 민요 가락을 자신의 오페라에 쓰지 않았다. 대신 어린 시절부터 익숙했던 보헤미아의 전통적인 민속춤들로 체코의 토속적인 정서와 언어를 보여주었다. 가장 유명한 그의 오페라 ‘팔려간 신부’에서도 극적인 주요 장면에서는 어김없이 생기가 넘치는 흥겨운 보헤미아 춤판이 벌어진다.

오페라의 성공으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한 스메타나는 프라하 오페라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으나 반대파들은 그를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스메타나의 오페라가 오케스트라 중심이란 점을 들어 그를 바그너주의자라고 비판하는 한편 스메타나 때문에 다른 체코 작곡가의 오페라들을 위한 상연 기회가 없어진다고 비난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들은 사람들의 서명을 모아 해임 청원서를 제출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안톤 드보르자크와 같은 유명 음악가들의 지지 덕분에 위기를 넘겼지만, 이러한 사태를 겪으며 스메타나의 건강은 크게 악화되었고 스스로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조국’ 보헤미아 산·강 등 소재
프라하의 블타바강. 스메타나 ‘나의 조국’ 중 ‘몰다우’의 소재가 됐다. [사진 사회평론]
인후 감염으로 시작된 그의 건강 문제는 발진에 이어 양쪽 귀의 청력을 차례로 잃게 만들었다. 삶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스메타나가 선택한 길은 인생의 마지막 역작을 작곡하는 것이었다. 위대한 걸작 ‘나의 조국’은 그렇게 탄생한다. 놀라운 것은 그가 지금까지 써왔던 오페라가 아니라 교향시라는 기악 장르를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교향시란 교향곡과 마찬가지로 오케스트라로 연주를 하지만 시나 소설 같은 문학적 서사로 구성된 관현악이다.

‘나의 조국’은 그 제목이 말해주듯이 보헤미아의 혼을 담고 있는 산과 강, 유서 깊은 성, 신화적인 전설을 소재로 삼았다. 6곡의 교향시로 이루어진 이 대작에서 가장 유명한 곡은 ‘몰다우’로 잘 알려진 ‘블타바’이다. 블타바는 보헤미아 남부 작은 샘에서 발원해서 프라하를 가로지르는 보헤미아에서 가장 길고 큰 강인데, 시작은 미약하지만 큰 강이 되어 도도하게 흐르는 블타바의 생명력에 빗대어 보헤미아의 민족정기를 표현하고 있다.

‘나의 조국’의 작곡을 마친 스메타나는 육체뿐 아니라 정신 건강까지 위태로운 상태에 빠졌다. 현기증, 경련, 일시적인 언어 상실과 함께 우울증, 불면증, 환각까지 생겼으며, 증세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제정신을 잃고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일이 반복되자 더 이상 그를 돌볼 수 없게 된 가족들은 그를 정신병원으로 옮겼고, 1884년 5월 12일 그는 그곳에서 60년간의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스메타나를 흔히 ‘체코 음악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체코 사람들에게 통하는 마음의 울림을 생생하게 소리로 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도 강제하거나 빼앗을 수 없는 민족의 소리로. 국토가 강점된 현실에서 ‘나의 조국’이야말로 그가 기원하고 꿈꾸던 해방의 공간이자 해방의 노래가 아니었을까. 그의 절절한 조국 혼에 그저 머리가 숙여질 뿐이다. 그의 탄생 200주년을 축하한다.

민은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부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음악과 페미니즘’‘독재자와 음악’‘대중음악의 역사’ 등을 주제로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최근에는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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