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 교황청까지 동원 이탈리아 친소 정당 집권 막았다
[제3전선, 정보전쟁] 미국의 선거 개입 정보전
CIA의 첫 해외 선거 개입은 1948년 3월 8일 미 국가안보회의(NSC)에서 결정됐다. 이날 회의는 그해 이탈리아 총선을 앞두고 무거운 분위기에서 개최됐다. 친소 인민민주전선(PDF·이하 인민전선)이 친미 기독교민주당(DC)을 이긴다는 예상이 나왔기 때문이다. 더욱 걱정된 것은 인민전선이 승리할 경우 예상되는 유럽 안보지형 시나리오였다. 인민전선이 승리할 경우 동유럽에 이어 이탈리아마저 소련 위성국이 되고, 소련은 이를 교두보로 내전중인 그리스까지 장악하면, 유럽문화의 원류격인 이탈리아·그리스가 모두 소련 수중에 떨어져 유럽 전역이 공산주의 물결로 뒤덮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날 NSC는 창설된 지 1년도 안 된 CIA에게 “실행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기민당의 승리를 이끌도록 특명을 내렸다.
유럽문화의 원류 공산화 도미노 우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CIA는 즉시 움직였다. 먼저 공산세력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반공세력 구축이 시급했다. CIA는 가톨릭 계에 도움을 요청해 어렵게 승낙을 얻어냈다. 여기에는 CIA의 로마 거점장이었던 제임스 앵글턴의 역할이 컸다. 예일대와 하버드 로스쿨을 나온 수재인데다, 아버지 사업을 따라 밀라노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탈리아 인맥이 탄탄했다. 특히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교황청과도 교류가 깊어 가톨릭의 지원을 얻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더 나아가 2차 대전 당시 미군에 협력했던 마피아의 지원도 이끌어 냈다.
지원세력을 확보한 CIA는 “공산당을 선택할 것인가? 신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선거 캠페인을 통해 이탈리아 국민들의 기민당 지지를 이끌어냈다. 국민 대부분 가톨릭 신자인 점을 겨냥한 캠페인이 주효했다. 교회와 마피아 조직을 통해 공산주의 폐해를 알리는 편지, 책자 등도 제작 배포했다. 선거자금도 1000만 달러(현재가치 1억 달러)를 투입해 소련의 인민전선 자금 지원을 압도했다. CIA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기민당은 총선에서 574석 중 305석을 차지하며 대승했다. 이 승리로 기민당은 1983년까지 집권하는 안정적인 정치환경을 만들어 전후 이탈리아의 발전을 이끌었다.
동아시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지역의 공산주의 확산을 경계하고 있던 CIA는 전후 일본도 우려스럽게 보고 있었다. 인접한 소련, 중국, 북한의 공산세력이 일본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걱정했다. 전후 일본의 정치적 혼란은 이런 걱정을 더 무겁게 했다. 일본의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작은 위험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CIA는 예방적 차원에서 일본의 정치지형을 강한 친미 구도로 만들기로 했다.
온건 진보세력을 친소 공산세력에서 분리시켜 친미 야당을 만드는 활동도 전개했다. 그 일환으로 온건 진보세력에게 신당 창당자금을 지원해 1960년 사회당 우파들이 민사당(民社党)을 창당하는 성과를 이끌었다. 이후 CIA는 민사당이 반공 야당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1964년까지 자금을 지원했다. 이 같은 사실들은 미 기밀해제문서인 〈미국의 대외관계집〉(FRUS)을 통해 확인된다. FRUS 제29권 제2부는 “미 정부가 일본정치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CIA의 비밀 정보활동 4건을 승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70년대 칠레에 대한 공산세력 침투도 집요하게 차단했다. 1970년 칠레 대선시 CIA가 지원한 호르헤 알레산드리 전 대통령이 예상과 달리 사회당과 공산당 연합후보인 살바도르 아옌데에게 석패하자, CIA는 포기하지 않고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비밀 군사쿠데타 준비에 들어갔다. 우선 친미 인사인 피노체트 육군 참모총장을 은밀히 접촉한 뒤 쿠데타 훈련, 무기 제공 등 내밀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아울러 아옌데 정부에 대한 민심 이반 등 쿠데타 여건 조성에도 주력했다. 칠레에 대한 미 정부의 경제지원 제한 발표에 발맞춰 CIA는 노조 파업 유도와 아옌데 대통령의 부정부패 유언비어 확산 등 정치, 경제, 사회 혼란을 증폭시켰다. 1973년 들어 혼란이 심화되자 그해 9월 쿠데타 세력이 세상 밖으로 나와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렸다. 집권 3년 만에 무너진 아옌데 대통령은 끝까지 저항하다 AK-47 소총으로 자살했다.
이때도 선거 개입의 필요성은 선명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전 명분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WMD) 제거와 진정한 민주주의 회복이었다. 따라서 이라크전의 정당성을 마무리하기 위해 이라크에 자유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이를 완수할 친미 아야드 알라위 총리가 2005년 선거에서 이란의 지원을 받는 이슬람 다와당 이브라힘 알-자파리에 질 것이란 정보보고가 올라왔다. 이에 CIA는 알라위와 접촉해 선거 지원을 위한 내부준비에 착수했다.
백악관·국무부·국방부·CIA 등이 이를 놓고 난상토론을 벌였는데 의외로 부정적 의견이 많이 나왔다. 냉전이 끝난 상황에서 외국 선거 개입은 정당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유 민주주의 가치와 충돌하고, 정치·외교·도덕적 리스크도 커 미국의 국익을 오히려 해친다는 것이 요지였다. CIA 내부에서도 선거 개입으로 인한 국내외 비판은 CIA의 정보활동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결국 부시 대통령의 결단으로 CIA의 이라크 선거 개입 계획은 전면 취소됐다. 그리고 그해 선거에서 이슬람 다와당이 승리했다.
이처럼 CIA는 냉전 시기 공산세력 확산 방지라는 미국의 대외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외국 선거에 정책적으로 개입했으며, 성과도 있었다. 이는 대외문제를 외교·군사적 수단으로 해결하기 곤란할 경우 정보적 수단으로 해결하도록 규정한 미 국가안보법(National Security Act)에 근거한 것으로, 정보는 외교·군사에 이어 제3의 수단이라는 뜻에서 ‘제3옵션’(the third option)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성과 못지 않게 그늘도 남겼다. 무엇보다 선거 개입은 심각한 내정간섭 행위라는 비판을 불러와 미국의 도덕적 리더십에 상처를 남겼다. 냉전이후 미국은 선거 개입을 극도로 자제하고, 대신 외국의 미 선거 개입 방어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반면 정치적, 윤리적 부담이 덜한 권위주의 국가들의 선거 개입은 증가하는 양상이다. 2020~2022년 사이 러시아의 외국 선거 개입이 무려 9개국 11개 선거에 이른다는 미 정보당국의 평가가 이를 말해 준다.
어느 나라건 정보기관의 외국선거 관심은 외면하기 어려운 유혹이다. 선거 개입을 통해 자국에 유리한 정치세력을 확보할 경우 자국 안보와 국익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시머(D. Shimer) 예일대 교수는 『미국과 러시아의 은밀한 선거 개입 100년사』에서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50여일 앞으로 다가온 이번 미 대선에서 미국과 권위주의 국가들의 선거 정보전 공방이 어떻게 될지도 주목된다. 개방된 선거제도를 가진 우리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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