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칼럼]내 아이에게는 식민지 트라우마를 물려주지 않겠다
좋은 일본인 친구마저 비난하고 상처 줘
‘日극우-韓정치인 선동에 흔들리지 말라’
아이에겐 혐오 극복하는 열린 마음 당부
그런데도 엔진은 멀쩡해서 그 차를 살살 몰아 무사히 집에 돌아왔다. 사람들이 병원에 가보라 했지만 몸은 또 멀쩡했다. 차를 깨끗이 수리하고 다시 운전을 시작했는데, 고속도로에만 나가면 차가 심하게 흔들려서 무서웠다. 차를 정비소에 맡기고 렌터카를 빌렸는데, 렌터카도 마찬가지였다. 정비사도 아내도 지인도 차가 흔들리는 걸 느끼지 못한다 해서 그제야 그게 내 문제라는 걸 알았다. 사람들은 그걸 트라우마라고 했다.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지금은 문제없이 고속도로를 달린다.
어느 한국 외교관으로부터 우리에게는 식민지 트라우마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나는 내 경험으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즉각 이해할 수 있었다. 1940년에 태어난 내 어머니는 식민지 시대의 기억이 많지 않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에서 친일파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일본인 순사를 데리고 집에 왔을 때, 외할머니가 손을 몹시 떨었던 걸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는 그 장면에서 느낀 감정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성인으로 그리고 조선인으로 식민지 시대를 살아야 했던 할머니는 그때 느꼈던 공포와 분노를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일본인을 늘 왜놈이라 불렀지만 내 어머니에게 굳이 반일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았다. 왜놈은 쫓겨났고 조선은 해방됐다. 할머니는 왜놈이 지배하던 시절을 곱씹으며 아파하지 않았다. 차 문이 찢기고도 내 몸은 멀쩡했듯이 해방된 조선의 할머니는 멀쩡하게 다시 평범하고 고단한 일상을 살았다.
그러나, 그 시대를 기억나게 하는 사건이 터지면 묻어 두었던 분노가 폭발한다. 할머니는 그 시대를 잊은 것이 아니라 묻어 두었을 뿐이다. 내 친가는 창씨개명(일본식 성명 강요)을 했고 외가는 하지 않았다. 친가는 어쩔 수 없이 했고, 외가는 끝까지 거부했다. 누군가가 창씨개명은 조선인 스스로가 원해서 한 것이라 하면, 어쩔 수 없이 해서 창피한 사람도 끝까지 거부해서 자랑스러운 사람도 모두가 분노한다. 그들이 기억하는 모멸감과 분노가 식민지 시대와 함께 사라진 것이 아니다. 겉보기에 멀쩡해 보여도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내 어머니 세대는 할머니 세대의 트라우마를 물려받았다. 어머니는 할머니가 손을 떨 때 자신의 감정이 어땠는지는 잊었지만 그때 할머니 감정이 어땠을지는 머리로 이해한다. 어머니는 할머니에게 공감하고, 식민지 시대를 미화하는 자들에게 분노한다. 내 세대 역시 교육을 통해 그 트라우마를 물려받았다.
트라우마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내가 고속도로에 나갈 때마다 차가 흔들린다고 느낀 것은, 다시는 위험한 운전을 하지 말라는 경고다. 그 경고를 무시하면 나는 다시 위험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기억하면서도 공포라는 감정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다시 운전대를 잡을 수 없다.
우리가 세대에 걸쳐 식민지 트라우마를 물려받은 것은,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경고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경고다. 그 경고를 가슴에 새겼다면 트라우마가 주는 모멸감과 분노는 오히려 극복해야 할 짐이다. 일본에서 산 25년을 돌이켜 보며 가장 후회하는 것은 과거사 문제로 좋은 일본인 친구와 싸운 일이다. 나는 그의 말을 경청해야 했다.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 있었는지 살폈어야 했고, 그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은 내가 고쳐 주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좋은 품성의 그가 나와 다른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놀라고 분노해 그를 비난하고 상처를 주었다. 내 안의 트라우마가 터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아이에게는 식민지 트라우마를 물려주지 않으려 한다. 일본 극우가 어떤 왜곡을 하든, 한국 정치인들이 어떤 선동을 하든, 그들에게서 분노와 혐오를 배우지 말라고 가르친다. 허다하게 쌓인 현안을 해결할 의지도 지혜도 없이 광복과 국적의 정의로 싸우며 자신을 포장하는 정치인들에게 선동당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선진국에서 나고 자란 우리 아이들은 역사에서 인간 존엄에 대한 교훈을 배우고,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이들과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는 선진 시민으로 살아갈 것이다.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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