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우리가 주고받는 것들

2024. 9. 13.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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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산책을 나선 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노인이 된 부모 옆에서 은행 애플리케이션 사용법과 의료기기 사용법을, 보이스피싱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같은 것들을 알려주고 있다.

"엄마, 이것 좀 봐봐요. 이렇게 해외에서 오는 문자는 읽지도 말고 삭제해버려." "아빠, 허리가 결리고 아플 때는 이거 5번을 눌러서 써야 되는 거야. 어디 한번 해봐요."

우리가 주고받은 것들은 돌봄 이상의 무엇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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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 많던 내가 스케이트 타도록
잘 넘어지는 법 가르쳐준 아빠
이젠 내가 은행앱 사용 알려줘
위험 막아주고 서로 북돋우며
주고받는 것들은 돌고 돈다

밤 산책을 나선 길이었다. 종일 비구름이 서성인 탓에 바닥이 제법 젖어 있었다. 나는 보도블록과 화단 옆에 생긴 자그마한 웅덩이들을 피하려고 바닥을 살피며 걸었다. 여름내 번갈아 피어나느라 바빴을 배롱나무꽃들을 보고 있는데 목소리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엄마, 나 좀 봐봐요!" 호들갑스러운 어조와 달리 굵고 걸걸한 목소리였다. 돌아보니 웬 중년 남자가 노인용 스쿠터에 앉아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남자는 자그마한 노인을 향해 오른손을 펴 보였다. "엄마 이쪽! 밥 먹는 손!" 스쿠터 손잡이를 잡고 얼마간 전진하던 남자가 손을 떼더니 말했다. "이렇게 손을 놓잖아? 레버를 딱 놓지? 그럼 멈추는 거야." 곧이어 왼손을 펴든 남자가 "왼손은 후진!"하고 외쳤다. 남자가 오른손 왼손을 번갈아 움직이는 동안 스쿠터가 앞으로 뒤로 이동했다. 강마른 체구의 노인 근처를 한 바퀴 길게 돌면서 남자가 말했다. "엄청 쉽지? 이거 타면 엄마 병원도 시장도 다 편하게 다닐 수 있어." 스쿠터가 멈추자 노인이 남자에게 다가갔다. 몹시 느린 걸음이었고, 벋정다리 때문에 상체가 심하게 출렁였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에게 아들이 스쿠터 사용법을 알려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 엄마가 해 봐. 남자가 스쿠터에서 내리려고 하자 노인이 팔을 휘저었다. "이거 하나도 안 어려워. 한 번만 해보자, 응?" 남자의 목소리가 달래듯 은근해지려는데 노인이 좀 더 크게 팔을 휘젓더니 말했다. "아유, 거기 진흙 있다. 거기 발 아래 물 있어." 남자가 잘 보이지도 않는 웅덩이를 피해 내려서자 노인은 그제야 어깨를 펴며 말했다.

"그 까짓것. 내가 다 하지. 뭐든 금방 배운다, 나는."

나는 괜히 근처를 서성이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스쿠터에 오른 노인은 한두 번 손잡이를 쥐었다 놓더니 앞뒤로 곧잘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핸들을 움직여 커브도 돌았다. 남자는 그런 노인의 곁에 바짝 붙어 노인보다 먼저 멈추고 전진하고 서둘러 휘어졌다. 그 모습이 아이에게 자전거를 처음 가르치며 전전긍긍하는 부모와 똑 닮아 있었다. 남자도 저런 식으로 네발자전거를, 보조바퀴를 뗀 두발자전거를 노인에게서 배웠을까. 그때도 노인은 남자를 주시하다 아유, 거기 돌 있다. 거기 바퀴 앞에 뭐 있어, 하면서 팔을 휘휘 내저었을까.

아빠는 겁이 많은 내게 어린 시절 자전거 대신 롤러스케이트를 가르쳐주었다. 나는 도무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허우적대다 뒤로 빠진 다리 때문에 넘어지기 일쑤였다. 그때 우리는 어땠더라. 아빠는 나를 조금도 한심해하지 않았다. 넘어질 때 잘 넘어지기만 하면 다 괜찮다며 낙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나의 아빠였으니까. 이후로 나는 힘차게 내달리지는 못하지만 제법 잘 넘어지는, 그래서 더욱 잘 일어서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노인이 된 부모 옆에서 은행 애플리케이션 사용법과 의료기기 사용법을, 보이스피싱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같은 것들을 알려주고 있다. "엄마, 이것 좀 봐봐요. 이렇게 해외에서 오는 문자는 읽지도 말고 삭제해버려." "아빠, 허리가 결리고 아플 때는 이거 5번을 눌러서 써야 되는 거야. 어디 한번 해봐요."

하나도 어렵지 않아, 일단 한번 해봐, 발밑 조심해야지. 우린 그런 말들로 서로를 북돋아주고 아주 사소한 위험까지 경고해주며 그동안 살아왔을 것이다. 언제든 손 뻗기 좋은 위치에 서서 서로를 지켜보며, 세상 사는 방식과 편리를 위한 용법을 일러주면서 말이다. 우리가 주고받은 것들은 돌봄 이상의 무엇이겠지. 전부 다 돌고 도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롤러스케이트가 타고 싶어졌다.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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