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한 실재와 허상[이주영의 연뮤덕질기](32)
명절 연휴는 축복이자 재앙이다. 친지들과 모임 속 뼈있는 대화와 명절 음식 장만 여파는 회포를 푸는 것과 동시에 탈출을 꿈꾸게 한다. 명절 노동으로 불거지는 고부갈등과 부부갈등은 사랑하는 이들을 폭력의 주체로 만든다. 오죽하면 ‘명절 이혼’이라는 신조어가 생겼을까. 본질을 허상으로 대체하며 참고 참다 극단으로 치닫는 것보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선언하고 실재를 직시한다면 연휴의 축복을 만끽할 수 있을지 모른다.
가상 부부와 현실 연인의 동상이몽
연극 <시뮬라시옹>(최양현 작·이태린 연출)은 인공지능(AI)이 일상이 된 가까운 미래, 확장된 허상이 본질을 대체하면서 생기는 혼돈을 다룬다. 선욱(송철호 분)은 갑작스러운 비행기 사고로 아내 상아(신사랑 분)를 잃고 슬픔에 잠식되던 중 동료가 죽은 반려견을 AI로 복원해 상실의 아픔을 치료하는 것을 보게 된다. 아내를 복원하기로 결심한 선욱은 아내에 대한 데이터를 스캔해 AI 시스템에 연결한다. 이제 특수 안경만 착용하면 일상 어디에서든 AI로 복원된 아내와 함께할 수 있다.
복원된 아내와 처음 만난 날, 그리움에 사무친 선욱은 아내가 눈앞에 있는 현실이 믿기지 않아 오열하며 웃는다. 멜로드라마적 절정이다. 그림을 전공하고 피아노와 베이킹을 배우느라 바쁜, 쾌활한 아내와의 일상은 행복하면서 밋밋하다. 반복되는 나날이 답답해진 선욱은 ‘진짜 아내’를 재현하기 위해 일기장과 메모장, 휴대전화, 노트북 데이터 등 더 많은 데이터를 입력한다. 더 풍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AI가 재현한 아내는 진짜일까?
선욱은 아내의 심연을 접하고 충격에 빠진다. 행복의 절정이라고 생각해온 모든 관계와 기억이 상아 입장에서는 소외와 폭력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선욱은 AI로 복원된 아내와 언쟁을 벌이고 생전에도 해본 적이 없는 막장 부부싸움에 이른다. 서로의 바닥을 본 선욱은 그런데도 아내가 그립다. 그는 AI가 복원한 ‘진짜 아내’와 대면할 수 있을까. 시스템을 초기화해 아내의 허상을 다시 소환할까. 아니면 ‘진짜’가 존재하긴 한 걸까.
<시뮬라시옹>이 부부의 ‘동상이몽’을 두 세계의 공존을 의미하는 거꾸로 매달린 가구들과 기술융합 등의 서사를 기반으로 다루었다면 연극 <랑데부>(문정희 원안, 김정한 작·연출, 최천중 작곡, 정소연 안무)는 정반대다. 무대 중앙에 놓인 가로로 긴 런웨이 중심으로 사방에 객석이 자리 잡고 있다. 일부 객석은 무대 위 두 남녀의 호흡과 땀방울을 공유할 정도로 가깝다. 검은색의 긴 런웨이 무대 위를 검은 정장의 남녀가 질주하면서 춤을 추고 과격한 행동을 하며 뛰어다닌다. 처음부터 실재와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겠다고 선언하는 무대예술이다. 다른 세상의 남녀가 우연히 만나 상처를 인식하고 이해하며 각자의 실재에 접근하는 과정을 다룬다.
로켓 공학자 태섭(박성웅·최원영 분)이 배달 짜장면의 맛이 잘못됐다고 항의하자 짜장면집 사장 지희(문정희·박효주 분)가 달려와 따지는 게 첫 만남이다. 자로 잰 듯 반듯해야 하고 신체접촉에 경기를 일으키는 강박증 환자 태섭은 자유로운 영혼의 무용수였던 지희와 맹렬히 싸우고 사과하면서 서로의 과거가 연결됐음을 깨닫는다. 지희의 상처가 태섭에게 축복이었던 상황을 확인한 순간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이야기와 춤으로 위무하지만,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질 수 없다. 실체를 공유할수록 닿고 싶으나 닿지 못하는 지점만 부상하기 때문이다. 중년에 이른 늦깎이 연인들의 소통은 로켓 발사 카운트다운과 남녀 2인무인 파드되(pas de deux)로 형상화된다. 서로를 놓아주기로 한 이들의 파드되는 그 어떤 러브신보다 애절하다. 이들은 현실적인 거리 두기에 성공할까. 아니면 불행을 감내하며 각자의 상처를 더 깊이 들여다볼까.
근대 연인들의 목숨 건 연대
동시대 현대인들의 복잡한 심리를 다룬 작품들에 비하면 근대 암울한 시대에 대항한 연인들의 삶은 명확하다. 1920년대, 일제강점기 실존 인물들을 다룬 창작 뮤지컬 <사의 찬미>와 <박열>은 어떤 측면에서는 <시뮬라시옹>과 <랑데부>보다 직설적이고 진보적이다. 짧고 소중한 생존의 시간 속 자아를 잃지 않으며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목숨보다 중요했다.
뮤지컬 <사의 찬미>(성종완 작·작사·연출, 김은영 작곡, 이헌재 드라마터그)는 1926년 8월 4일 현해탄을 건너던 부산행 관부연락선 안에서 실종된 극작가 김우진과 소프라노 윤심덕의 비극적 결말이 사실은 해피엔딩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에서 시작됐다. 전라도 거부의 아들로 와세다대학에 유학 중이던 김우진은 아이가 있는 유부남이었다. 도쿄음대생 윤심덕은 당대 유학생 사회에서는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주목받던 소프라노였다.
속절없이 사랑에 빠진 이들의 삶은 여러 드라마와 영화로 재현됐으나 뮤지컬 <사의 찬미>는 기존 서사를 거부한다. 1926년 8월 4일 현해탄을 건너는 관부연락선 위가 현재, 그들이 처음 만난 1921년을 과거로 놓고 시대의 아픔과 가족들에 얽힌 삶을 저울질하며 둘만의 삶을 도모하는 과정을 스릴러물에 담았다. 2013년 초연 후 올해가 일곱 번째 시즌인 대학로의 대표 흥행작품이다. 극 중 윤심덕이 부르는 ‘난 그런 사랑을 원해’는 현대인들의 심연을 드러낸 넘버로 알려져 있다.
독립운동가이며 아나키스트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부부의 삶을 다룬 뮤지컬 <박열>(이선화 작·작사, 성종완 연출, 이유정 작곡) 역시 마찬가지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6000여명의 조선인이 학살된 상황을 세상에 알리고 저항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권력에 맞서며 자유를 수호하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같은 세계관과 정체성을 가진, 연인에서 부부로 마지막까지 같은 방향을 향해 달린 동지로서의 삶은 동시대 현대인들이 흠모하는 이상향이다. 영화로 잘 알려진 박열 일대기와 달리 올해 두 번째 시즌인 뮤지컬 <박열>은 두 연인이자 부부의 확고한 연대와 확장된 사랑을 현대적인 록 발라드로 시원하게 표현했다.
연극 <시뮬라시옹>과 <랑데부>는 사상누각 같은 동시대 남녀관계의 실재와 허상을 들여다보며 솔직해지자고 말한다. 뮤지컬 <사의 찬미>와 <박열>은 근대 실존 인물들이 시대적인 암울함 속에서도 허상을 깨고 실재를 획득하는 용기를 다루고 있다. 모방이라는 의미의 ‘시뮬라시옹(simulation)’은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에 의해 원본을 대체한 허상으로 재해석됐다. ‘랑데부(rendez-vous)’는 서로 다른 세계의 만남과 조화를 상징한다. 친인척들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송편을 먹는 풍경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허상이다. 가부장 제도와 유교적 가치관에서 비롯된 허상에 매몰되기 전 각자의 실재를 인정하고 랑데부할 용기가 필요한 시기다. <시뮬라시옹>은 9월 15일, <랑데부>는 9월 21일, <박열>은 9월 29일, <사의 찬미>는 10월 27일까지 상연한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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