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깎는 장인 김도현 “감정에 솔직한 슈만은 소극적인 내게 길을 열어줘”

이정우 기자 2024. 9. 13.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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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서 리사이틀
“스승 바바얀은 ‘명의’”
“음악과 연주자 사이 쌍방 합의 필요해”
피아니스트 김도현. 마포아트센터 제공

"음악은 찾아가는 과정이 재밌어요. 무대에 서는 건 수명을 깎아내는 느낌이고, 어떻게 될지 몰라 불안하지만, 그래서 재미있어요."

피아니스트 김도현은 신기한 연주자다. 무대가 너무 떨리지만 음반 녹음보단 공연이 좋다. 늘 불안해하지만, 미리 준비하기보다 즉흥적인 편이다.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학교를 함께 다닐 정도로 어릴 적부터 피아노에 재능이 있었지만, 미국으로 유학가기 전까진 전문 피아니스트가 될 생각이 없었다. 성공의 척도인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의 협연보다 실내악의 매력에 빠졌다는 ‘커리어 욕심 없는’ 피아니스트 김도현을 13일 독주회를 앞두고 만났다.

더브릿지컴퍼니 제공

◆인생의 전환점 세르게이 바바얀

지난 달 3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피아니스트 세르게이 바바얀 독주회 직전 안내방송에서 김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커튼콜 이후에도 사진 촬영은 금하고, 연주가 이어지니 중간에 박수도 치지 말아주세요." 남들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하는 김도현이지만, 오로지 스승의 공연을 위해 눈 딱 감고 했던 거란다. 바바얀은 그에게 어떤 사람이길래.

미국 클리블랜드 음악원 유학 시절 만난 명피아니스트 세르게이 바바얀은 김도현을 진정한 피아노의 길로 이끈 인물이다. "일상의 행복을 누리고 싶으면, 피아니스트의 길은 갈 수 없다"는 스승 바바얀의 충고는 김도현을 뒤흔들었고, 이후 그는 피아니스트의 길에 매진했다.

그전까지 김도현은 "그냥 친구들이랑 연주하고 노는 게 좋았"고, "성진이(조성진) 같은 친구에 비하면 ‘내가 무슨 피아니스트를 하겠냐’는 생각도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바바얀과의 만남 이후 자신의 음악을 찾아 나선 김도현은 2017년 스위스 방돔 프라이즈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 2021년 이탈리아 부소니 콩쿠르 준우승 및 현대작품최고연주상을 수상하며 세계 안팎에 두각을 드러냈다.

김도현은 바바얀에게 받은 가장 인상적인 조언으로 "피아노란 악기를 사람의 목소리처럼 표현하라고 한 것"이라며 "언어에 억양이 있듯 음 안에 강세와 감정을 담아서 솔직하게 표현하라는 지도가 신선했고, 전환점이었다"고 회상했다. 김도현은 또 바바얀을 ‘명의’로 칭했다. "보통 선생님들은 추상적으로 지적하는데, 바바얀은 ‘이게 문제야’라고 콕 짚어서 진단을 내려요. 그 진단이 남다른데, 제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감각을 찾아줍니다."

현재 최고의 주가를 올리는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인 다닐 트리포노프와도 클리블랜드 음악원 시절 인연이 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김도현의 연주를 인상깊게 본 트리포노프가 김도현에게 공연의 오프닝에 서달라고 요청한 적 있단다.

김도현은 전날 "너무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당신의 공연을 망칠 것 같다. 정말 미안한데 못하겠다"는 메시지를 트리포노프에게 보냈다. 이에 대해 트리포노프의 메시지는 이랬다. "다른 사람의 의견은 신경쓰지마. 무대를 즐기고, 네가 무대에서 연주하고 있음에 기뻐해." 김도현은 "예민해서 무대에 설 때마다 떨리는데, 트리포노프의 이 말을 항상 품고 무대에 올라가게 됐다"고 말했다. 또 "허공이나 물 안에서 건반을 눌러보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방식 역시 트리포노프의 영향"이라고 덧붙였다.

마포아트센터 제공

◆"감정에 솔직한 슈만, 동경의 대상이자 최애 작곡가"

이날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열리는 김도현의 독주회에서 핵심은 낭만주의 음악가 슈만이다. 그는 2부에서 슈만의 ‘꽃의 곡’과 ‘카니발’을 연주한다. 김도현은 "슈만이란 사람을 너무 좋아한다"며 "감정에 엄청 솔직한 그는 동경의 대상이자 공감의 대상"이라고 말했다.

"제가 평소엔 수줍고, 소극적이에요. 좀 점잖게 보이려고 하고, 저를 다 보이지 않으려고 하고요. 그런데 슈만이 음악을 통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걸 보면서 많은 걸 느끼죠. 슈만의 음악은 제가 음악을 통해 거침없이 표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 같아요."

김도현은 ‘카니발’에 대해 "너무나 이상적으로 쓰여 있는 ‘크라이슬레리나’나 ‘판타지’에 비해 이상과 현실의 균형감이 잘 잡혀 있다"며 "작가가 되고 싶었던 슈만의 좌절감이 음악 속에 수수께끼로 나타나는데, ‘카니발’은 슈만의 ‘수수께끼 컬렉션’의 시작 같은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보통 피아니스트들이 연주할 때 종종 빼고 넘어가는 ‘스핑크스’를 치는 이유도 수수께끼가 슈만으로 가는 열쇠라는 판단 때문이다.

"이전엔 슈만을 잘 알아야 잘 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쉬면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악보에 있는 그대로 연주하는 게 슈만의 음악을 보여주는 참된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정신분열을 앓았던 슈만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제 감정에 솔직하게 연주할 겁니다."

1부에서 연주하는 발라키레프의 ‘이슬라메이’는 극도의 기교를 요하는 곡. 김도현은 "지금 이 곡을 치는 게 과연 맞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유는 부상을 입었던 손에 아직 통증이 남아 있어서다. 그는 "마지막 연타하는 부분에서 아직 통증이 느껴진다"며 "슈만 역시 하필 아픈 손가락 부분에 무리가 많이 가는 곡"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 곡들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하다. "다른 사람의 연주를 듣는 것보다 제가 직접 칠 때 제가 생각했던 음악적 감정을 표현할 수 있으니까요."

마포아트센터 제공

◆운명론자 "음악과 내가 쌍방 합의가 돼야"

김도현은 운명론자다. 그는 "어떤 작품을 연주할 때, 연주자가 작품을 선택한 것 만큼 작품도 연주자에게 다가와야 한다"며 "연주자와 작품 간 쌍방 합의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게 맞는 음악을 찾고, 그 음악이 나를 찾으면서 서로 합의되는 지점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집중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그의 목표는 화려한 레퍼토리를 가진 ‘스타’이기보단 자신과 합의된 음악을 깎아나가는 ‘장인’에 가깝다. 그는 당장의 성과를 바라는 현실엔 안타까움을 표했다. 김도현은 "연주자들 저마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장인이 되는 건데 요즘 사회는 너무 빨리 결과물을 요구하는 것 같다"며 "음악을 찾아나가며 성장하는 음악가들의 성장을 기다려줬음 좋겠다"고 말했다. "20대의 슈만과 30대의 슈만, 40대의 슈만이 다 다를 수 있잖아요. 저는 이렇게 음악적 합의를 찾아가는 과정이 재밌어서 이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아요."

김도현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커리어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 없다"는 그는 다만 "목소리 만으로 가수를 아는 것처럼, 연주만으로 누군지 알아챌 수 있는 연주자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딱히 어느 시기까지 어떤 작품을 정복해야겠다는 목표를 세우지 않는 스타일이지만, 최근 "내년까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발트슈타인’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바흐 파르티타 역시 그가 해내고 싶은 음악이다.

그렇다면 어떤 연주자로 기억되고 싶을까. 그는 "특별한 연주자로 기억되기 보다 그냥 인간적인 모습을 가진 주변 사람처럼 비쳤으면 한다"며 "주어진 대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데 익숙하다"고 답했다. 최근 부쩍 친해진 피아니스트 임윤찬, 첼리스트 한재민과 비교해 자신은 "연주자로서 역량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이 피아니스트는 늘 겸손하지만, 다른 사람과 조금은 다른 특별한 연주를 들려줄 것이다.

인터뷰 내내 겸양의 태도를 견지했던 김도현을 대신해 스승 바바얀이 그에 대해 한 평가를 덧붙인다.

"열정과 겸손을 겸비했으며, 따뜻한 마음, 폭발적인 기질, 최고의 감수성, 스타성, 날카로운 분석력, 깊은 음악적 해석, 군중 속에서 돋보일 수 있는 훌륭한 연주자로서 자질을 모두 갖추고 있다."

이정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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