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거들 뿐, 편견 거두니 희망이 보이더라
“여기 우승하고 싶어서 온 사람 있어요? 이기면 기록으로 남겠지. 근데 그거 남겨서 어디다 쓰게? 기록을 남기러 왔는지, 기억을 남기러 왔는지. 그건 선수들이 판단합니다.”(영화 ‘드림’ 중에서)
감독 역할을 맡은 배우 박서준은 우승 후보 독일전을 앞두고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단순 성적만 생각했다면 브라질 용병을 투입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감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진 독일전, 0 대 5로 뒤진 후반전 한국 대표팀의 한 선수가 첫 골을 넣는다. 큰 점수 차로 뒤진 상황에서 나온 그저 그런 기록이지만, 선수단 모두가 첫 골의 기쁨을 함께 기억으로 남겼다. 그리고 모두가 알겠지만, 이 영화는 실화다.
첫 골보다 중요한 기억
영화 ‘드림’의 배경은 2010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홈리스월드컵이다. 한국이 처음 참여한 월드컵에서 첫 득점을 한 주인공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2024년 8월26일 서울 지하철 고속터미널역 8번 출구 앞에서 만난 오현석(54)은 첫 득점의 기억에 대해 담담히 돌아봤다. “사실 첫 골의 기쁨은 잠시였죠. 또 바로 (골을) 먹어서. 그래도 첫 득점 이후 골을 좀더 넣긴 했어요.” 그는 14년 전 홈리스월드컵에 출전했을 때처럼 작은 키에 마른 체형이었다. 주름은 조금 더 파였지만 더 밝아 보였다. 현석은 부지런히 잡지 ‘빅이슈 코리아’를 팔 준비를 하면서도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사실 성격이 많이 바뀌었죠. 적극적으로 하게 되더라고요. 처음엔 정말 쑥스러워서 판매도 못했어요. 홈리스월드컵에선 계속 옆에서 누군가 용기를 줬거든요. 할 수 있다고 계속 얘기해줬어요. 자연스럽게 성격이 바뀌더라고요. 모두가 같은 사람으로 봐주고 편견 없이 바라봐줘서 그런 것 같아요.”
그가 거리로 나온 건 30대가 훌쩍 넘어서였다. 특별한 일을 하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살던 그는 형제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던 2006년 형제와 다툰 뒤 홧김에 집을 나왔다. 그때부터 서울 가리봉동과 신도림, 영등포 등을 돌아다니며 노숙했다. 노숙하면서 만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니다보니 어느새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전단을 본 건, 이제는 좀 이 생활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차오르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희망 공고, 고시원 지원 및 임대주택 지원’
공원 무료 급식을 기다리면서 받아본 전단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2010년 창간한 ‘빅이슈 코리아’에서 배포한 전단이었다. 1991년 영국에서 창간된 ‘빅이슈’는 홈리스를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잡지다. 처음에 10부를 무료로 제공하고, 그 수입으로 잡지를 재구입하도록 한다. 빅이슈 판매원이 된 홈리스는 판매대금의 절반을 가져가는 시스템이다. 당시 ‘빅이슈 코리아’는 10부를 판매하면 첫 달 고시원비를 지원했다. 또 6개월 이상 꾸준히 판매한 홈리스에겐 임대주택에 들어갈 기회를 마련해줬다.
‘빅이슈 코리아 판매원’이 된 현석은 곧바로 홈리스월드컵에도 나가게 됐다. 홈리스월드컵은 빅이슈 스코틀랜드 창립자인 멜 영이 계획해 2003년 오스트리아에서 처음 시작했다. 영은 잡지만 판매해선 홈리스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축구를 통해 사회적인 관심을 만들고 분위기와 제도를 바꿔보고자 했다. 이후 스코틀랜드에 홈리스월드컵재단이 만들어졌고, 매년 월드컵을 개최하고 있다. 대회엔 여성팀과 남성팀이 모두 출전하는데, 한국은 아직 여성팀 출전 기록이 없다. 2024년 서울에서 개최되는 홈리스월드컵을 맞아 첫 여성 대표팀 구성을 시도했지만, 모집되지 않아 무산됐다.
“홈리스의 범위는 이렇게 넓다고요”
나라마다 홈리스를 정의하는 건 다르지만, 홈리스월드컵에 출전할 수 있는 조건은 간단하고 명확하다. “서유럽이나 미국은 중독의 문제가 있지만 일부 국가에선 빈곤이 더 큰 문제입니다. 또 전쟁이 중요한 문제인 나라도 있죠. 모든 선수를 통합하는 한 가지 조건은 사회적 배제로 인해 고통받은 이들이라는 점입니다.” 2024년 4월19일, 홈리스월드컵이 열릴 예정인 서울 한양대에서 만난 제임스 맥미킨 홈리스월드컵재단 최고운영책임자(COO)가 말했다.
한국은 2010년 처음 대회에 출전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선수단 대부분을 빅이슈 코리아 판매원으로 꾸렸다. 그러나 이후 꾸준히 대회 출전을 하면서 점차 다양한 ‘홈리스’가 포함됐다. 거리에서 노숙하는 이들 외에도 알코올 중독자, 자립준비청년, 위기청소년, 장애인 등으로 범위가 넓어졌다.
2010년 첫 대회부터 2024년까지 홈리스월드컵에 출전하는 선수들을 지원한 빅이슈 코리아 상임이사 안병훈(2024 홈리스월드컵 선수단 단장)은 8월26일 서울 성수동의 빅이슈 코리아 사무실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희가 자립준비청년이나 위기청소년, 난민, 장애인과 같은 소수자들을 홈리스월드컵에 출전하는 선수들로 더 모집하려는 것도 보여주려고 하는 거거든요. 이런 선수들도 홈리스월드컵에 나간다, 국외에서 정의하는 홈리스의 범위는 이렇게 넓다고요. 외국에선 홈리스를 시설 중심이 아니라 주거 중심으로 봐요. 이 명확한 이야기가 한국 사회에선 아직 통용되지 않는 거죠.”
한국에선 20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부랑자, 부랑인이라는 용어를 주로 썼다. 노숙인이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건 1997년 아이엠에프(IMF) 경제위기 때였다. 경제위기 여파로 거리로 많은 이들이 나오면서 기존의 부랑인과 다른 집단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숙인 지원에 관한 법이 생긴 건 이로부터 10년이 훌쩍 지나서였다.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은 2011년 국회를 통과했고 2012년 시행됐다. 이마저도 홈리스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노숙인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범주가 축소됐고, 18살 미만의 아동이나 청소년은 대상에서 빠졌다. 복지서비스 관련해서도 대부분이 ‘~할 수 있다’는 선택조항에 그쳤다. 빅이슈 코리아를 비롯해 관련 단체들이 법 개정을 요구하는 이유다.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처음으로 미국에서 열린 2023년 홈리스월드컵에 나간 선수들도 대부분 자립준비청년이나 위기청소년들로 구성됐다. 가장 늦게 대표팀에 합류한 유달우(25)도 보육원 출신의 자립준비청년이다. 젊은 선수들로만 구성되다보니 실력도 좋았다. 어린 시절 풋살을 배운 달우와 축구를 배운 선수도 몇몇 있었다. 대회 최종 성적은 5승6패 19위. 상위권은 아니지만 역대 최고 성적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겐 성적이 중요하지 않았다. 7월23일 서울 은평구에서 만난 달우는 경기 성적보다 특별했던 것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에라 모르겠다, 말춤을 췄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편견이 없더라고요. 그 대회에 나온 사람들도 저희와 같은 홈리스잖아요. 들어보니까 국외 선수들은 마약 중독자도 있고 알코올 중독자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까 평범하게 생겼어요. 중독자라고 믿어지지 않았어요. 성격도 되게 좋고 그 사람들도 편견이 없었거든요. 그때 든 생각이 ‘중독도 딱히 죄가 아니구나. 나도 편견 없이 살아야겠구나’였어요.” 달우가 말했다. 그는 빵집을 열겠다는 목표로 현재 열심히 일하고 있다.
달우와 함께 태극마크를 달았던 차광환(18)에게 홈리스월드컵은 좀더 특별했다. 대회 출전을 위해 미국 새크라멘토에 도착한 다음날, 광장에 모든 나라 선수들이 모였다. 조 추첨을 위해 대기하는 동안 광장에 설치된 스피커에선 음악이 흘러나왔다. 신나는 음악이 이어지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나왔다. 에라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벌떡 일어나서 말춤을 췄다. 광환을 보고 다른 나라 선수들이 모였다. 어느새 수십 명이 모인 춤판이 벌어졌다. 그 이후 모든 선수가 광환을 알아봤다. 지나가던 외국 선수가 광한을 보고는 이렇게 말하며 웃기도 했다. “오, 댄싱머신.”
춤은 시작이었다. 대회 내내 광환은 많은 외국인과 웃고 떠들었다. 번역기만 있으면 못할 대화도 없었다. “월드컵에서 만난 친구들이 정말 편견이 없었어요. 한번은 농구장에서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는데 뭐라고 해야 하지, 공감을 잘해주더라고요. 솔직히 저는 장난으로라도 눈을 찢거나 욕도 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일절 없었어요. 월드컵 오기 전엔 외국인한테는 인사도 잘 못했는데 한국 사람보다 좋아지더라고요.”
대회가 끝난 뒤에도 연락은 이어졌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하고 뜬금없이 영상통화가 걸려 오기도 했다. “최근까지도 연락했어요. 제가 브라질 코치랑 되게 친한데, 한국에서 열리는 홈리스월드컵에 못 올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무슨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꼭 왔으면 좋겠다고 얘기했어요.” 광환이 말했다. 그가 대회 이후 만든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여행하며 월드컵 때 만났던 친구들을 다시 만나는 것이다.
월드컵의 ‘선한 영향력’
빅이슈 코리아의 안병훈은 이런 변화를 월드컵의 ‘영향력’이라고 말했다. “분명한 점은 선수들이 다녀오고 나서 굉장한 영감을 받고 긍정적으로 변한다는 거예요. 누군 대학에 진학하기도 하고 누군 가족관계를 회복하기도 하죠. 취업하기도 하고 자격증을 따는 분도 있고요. 한 발짝 더 나아가는 모습이 있어요. 그게 홈리스월드컵이 주는 희망인 것 같아요.”
홈리스월드컵 재단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2003년 첫 월드컵 이후 120만 명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월드컵에 참여한 선수 중 94%가 홈리스월드컵이 자신의 삶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답했고, 83%는 가족 및 친구와의 관계가 개선됐다고 했다. 선수들뿐만이 아니다. 2016년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열린 홈리스월드컵을 보러 온 시민 86%가 홈리스가 직면한 문제에 관해 더 잘 알게 됐다고 응답했다.
“우리는 단순히 경기장을 제공하지만, 선수들은 이 행사를 통해 자신감과 정체성을 얻습니다. 미래의 선수들에게도 롤모델이 되죠. 대중의 인식을 바꾸는 것도 중요합니다. 홈리스는 결국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야 해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원인도 다양해요. 환경적일 수도 있고, 전쟁일 수도 있고, 가난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일의 핵심은 축구라는 도구를 이용해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노력으로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임스 맥미킨의 말이다.
한국에서 열리는 축제는 어떨까
2023년에 이어 2024년에도 홈리스월드컵 한국 대표팀 감독을 맡은 이한별은 이렇게 말했다. “돌이켜보면 (월드컵 이후) 잘 지내는 친구들도 있지만 분명 그렇지 않은 친구들도 있습니다. 광환이를 보면 정말 이 대회의 취지에 맞게 희망을 얻을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을 보낸 것 같아요. 축구를 통해서 이렇게 행복을 얻을 수 있구나. 그 친구를 보면서 그런 걸 많이 느낄 수 있었어요.” 2024년, 한국에서 열리는 홈리스월드컵은 선수들과 한국 국민에게 어떤 기억을 남길까.
류석우 기자 raint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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