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대한 ‘조선 야사’ 번역하면 웹툰 같은 K-컬처 얼마든지 만들죠”[M 인터뷰]
유교 책판 등 자료 65만점 보관
이를 모두 번역하는 것이 목표
현재 역사는 조선왕조실록 중심
백성들의 삶 알리는 콘텐츠 필요
한자 때문에 ‘디지털화’에 고충
‘AI 자동번역 시스템’ 구축 중
국학의 현대화, 한국학 세계화
과거와 현재의 가교 역할하겠다
인터뷰=김충남 사회부장 utopian21@munhwa.com
정리=노지운 기자
민간 국학 기록과 자료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국내 최고의 한국학 연구기관으로 꼽히는 한국국학진흥원. 이곳엔 우리 선조들의 혼과 삶의 지혜가 오롯하게 깃들인 각종 문집과 일기장, 유학자들의 저작물을 간행하기 위한 나무판인 ‘유교 책판(冊板)’, 각종 편액(扁額) 등 무려 65만 점의 자료가 최첨단 스마트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 고리타분하고 난해한 자료가 아닌 선조들의 당대 고민과 현실 타개책이 담긴 이러한 소중한 콘텐츠를 일반 대중이 쉽게 접촉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과거와 현재를 접목하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국학의 현대화’와 ‘한국학의 세계화’라는 웅대한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
2021년부터 한국국학진흥원을 이끌고 있는 정종섭 원장은 특히 지난해 12월부터 일반 백성들의 삶의 이야기가 담긴 국내 최대 규모의 전통 생활사 총서 발간 작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선조들의 미시적인 일상을 파악할 수 있는 핵심 자료인 일기와 고문서를 통해 조선 시대를 샅샅이 들여다보겠다는 취지다. 조선 시대 민초들의 생활을 분석해 어떻게 우리 국민이 더 행복하고 나은 삶을 살 수 있을지를 제시해 보겠다는 것이다. 정 원장은 우리 국학 자료를 국민이 향유해 새로운 창작물의 원천으로 삼고, 우리 문화의 다양성과 깊이를 전 세계에 전파하는 데 주력하겠다는 의지도 강하게 내비쳤다. 그는 “우리 선조들의 삶이 그대로 녹아 있는 국학 자료는 새로운 K-스토리(K-컬처)의 단초가 될 수 있다”며 “후손들이 전쟁통에도 선조의 기록물을 신줏단지 모시듯 숨기고, 보관한 노력이 모인, ‘한강의 기적’과 같은 수많은 민간 자료를 활용하면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있다”고 말했다. 정 원장과의 인터뷰는 지난 8월 19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에 있는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이뤄졌다.
―대중성과 전문성을 결합한 생활사 총서 발간이 지난해부터 시작됐다. 생활사 총서 발간의 의미는.
“지금 우리가 아는 조선의 역사는 모두 왕실 얘기다.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두는 가운데 지식인들이 써낸 ‘문집’ 위주로 구성돼 있어 ‘지식인 사회’의 모습만이 서술돼 왔다. 조선 역사의 빈칸은 일반 백성 다수가 어떻게 살았는지다. 지식인 사회와 백성들 사이에는 어떤 상호작용이 있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일기장’과 ‘고문서’ 위주로 구성된 국학 자료들을 분석해야 얻어낼 수 있다. 조선 사회가 백성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는지, 그러지 못했다면 왜 그런지를 밝혀내는 작업이다.”
―예를 든다면.
“조선 시대 대동법이나 균역법 등이 선진적이고 긍정적인 제도라고 하지만 그게 생활에서 제대로 구현됐는지, 왜곡됐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런 자료를 보고 있다 보면 이론적으로는 좋은 것 같지만 현실에서 제대로 집행이 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백성들이 골탕을 먹어 민란이 일어난 경우도 있다. ‘어느 마을에는 이런 케이스가 발생했구나’ 하는 식으로 미시사를 들여다봐야 알 수 있다. 우리가 가진 국학 자료에는 정사에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 많다.”
―인공지능(AI) 자동번역시스템 구축 등 국학 자료 디지털화에 힘쓰고 있다고 들었다. 목적이 무엇인가.
“우리 원의 방대한 자료는 누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새롭게 재해석될 수 있다. 누군가에겐 죽은 자료지만 누군가에겐 영감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국학진흥원 자료의 텍스트 활용 방법 또한 다양하다. 재미있는 몇 개의 ‘야사’나 당시의 재판 결과 같은 것을 만화가나 웹툰 작가들에게 전달해 2차 창작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미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K-컬처의 새로운 다양성을 불어넣는 것이다. 자연스레 국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많아질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대중에게 ‘공개’, 즉 번역하는 것이다. 자료의 내용을 디지털로 변환해 모두가 우리말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디지털화 사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문제는 한자다. 한자는 읽을 수 있는 사람이 한정돼 있다 보니 번역 인력이 극히 제한돼 있다. 일일이 65만 점 자료를 번역한다면 몇 백 년이 걸릴 것이다. 그래서 2030년까지 AI 기술을 접목해 자동번역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첫째 단계는 한자가 초서로 돼 있는 건 읽기 힘드니 초서를 정자 문장으로 바꿔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글씨체 형태만 바꿔주는 작업으로 현재 90% 정도 완료됐다. 다음 단계가 번역인데 이것이 매우 어렵지만 AI 기술을 접목하면 가능하다고 본다. AI에 현재 번역돼 있는 모든 한문 자료를 학습시킨 후 자료를 영어에서 한글로 번역기 돌리듯 한자에서 한글로 번역하는 것이다.”
―번역기로 돌릴 경우 오류가 있을 수 있지 않나.
“물론이다. 예를 들어 한시를 번역한다 해도 의미는 비슷하지만 얼마나 깊이 있게 우리말로 번역하는가는 전공자 수준에 따라 다르다. 같은 의미라도 다른 단어로 하면 원래의 맛을 더 낼 수 있는 센스가 사람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미 전달의 동일성까지는 달성할 수 있기에 번역기가 도입되면 획기적으로 번역 속도가 높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국학진흥원은 경북도가 1996년 설립했는데, 어떻게 전국적으로 민간 자료를 모으게 됐나.
“다른 지역에도 유사한 기관들이 있지만 우리가 제일 크고 제일 먼저 시작했다. 이 많은 자료를 모았다는 게 한강의 기적과 같다. 우리 집만 봐도 직계 선조들 문집 정도만 있고 한학을 하신 아버지 책은 모두 사라졌다.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면 옛날 전쟁 때도 신주 모시듯이 책과 현판 등을 끌어안고 다녔다고 한다. 어딘가 보관하고 숨기고 해서 남아 있는 게 65만 점이면 기적 아닌가.”
―자료 수집은 어떤 방식으로 하나.
“기증은 잘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원에서 도입한 것이 기탁제도다. 소유권은 자료 보유한 사람이 갖고, 여기에 보관을 맡기는 것이다. 국가 예산이 들어가기 때문에 보존된 내용은 국민 모두가 활용할 수 있다. 우리 원 박사들이 어느 집안에서 어떤 자료가 내려온다는 걸 파악해 직접 찾아가서 뭐가 있는지 보고, 기탁제도를 설명하고 자료를 모은다.”
―국학진흥원이 진행하고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 사업이 상당히 인기다.
“이 사업은 이야기 할머니를 선발 양성한 뒤 전국 유아교육기관에 파견해 삶의 지혜가 담긴 옛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국학 박사들이 방대한 이야기 자료 속에서 오늘날에도 유효한 콘텐츠를 발굴하고 가공하면 이걸 토대로 할머니들이 1년 동안 훈련을 받는다. 이분들의 수준도 굉장히 높아 많은 호평을 받았다. 아이들한테 새로운 교훈을 주는 것도 좋지만 가장 중요한 건 사람과 사람 간의 만남이다. 요즘 세대는 할머니 세대를 잘 못 보고 자란 만큼 할머니로부터 정을 받는다든지 한 기억이 별로 없다. 반면 할머니들은 아이들을 늘 귀여워 해주니 아이들한테 정서적으로 좋은 효과로 작용한다. 나중에는 아이들이 할머니를 기다리기 시작한다. 할머니의 표정과 행동 속에 아이들을 향한 애정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 성공 요인이었다. 할머니들 본인도 행복해진다. 어떤 할머니는 사업에 참여한 후 아픈 게 다 나았다고 하면서 좋아하더라. 아직도 자신이 이 사회에서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니, 자존감도 높아지는 등 긍정적인 선순환이 형성됐다.”
―올해 3월 국학진흥원 원장직을 연임했다. 남은 임기 동안 달성하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국학 자료를 전 국민이 향유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목표다. 디지털 사업과 최신 기술을 적용해 고문서를 읽기 쉽게 만드는 작업에 중점을 둘 것이다. 그다음엔 해외 기관과 연결망을 가능한 한 많이 만들어 우리 국학 자료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싶다. 이 자료 안에는 임진왜란 이전 요리책도 있고 100가지 넘는 가양주(집에서 만드는 술)와 종류별 제사 음식도 소개돼 있다. 우리가 봤을 때는 별거 아니지만 외국인에게는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그렇기에 이걸 오픈하는 게 제일 중요하고 외국 기관들, 연구기관, 소장기관, 전시기관과 업무협약(MOU)을 체결해 활성화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조상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자료를 세계화할 수 있다.”
우리 현실 맞는 헌법학 연구 평생 바쳐… YS때 대통령제 한계 지적, 개헌 주장
■ 정 원장은 누구
정종섭 한국국학진흥원 원장은 1970년대 유신 후반기 ‘헌법’에 대한 고민을 시작으로 헌법학자로의 길을 걸었다. 그는 법학 교수 시절에는 ‘책임총리제’ 도입을 주장하고 정계 입문 후에는 개헌 문제를 앞장서서 거론하는 등 한국 현대사에서 불가능한 명제처럼 받아들여지는 ‘성공하는 정치’를 제도적으로 만들기 위해 헌신했다.
그는 문화일보와 인터뷰에서 우리나라를 어떻게 근대 헌법 국가 원리에 맞는 정상적인 국가로 만들지를 화두로 삼아왔다고 했다. 정 원장은 “헌법에 맞도록 우리 사회를 뜯어고치자는 개혁적인 생각으로 현실 정치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그는 실제로 김영삼 정권 말, 대통령제의 한계와 폐단을 지적하며 개헌 필요성을 주장했다. 2002년 김대중 정부 말 박세일 교수 등과 함께 한국 대통령제도의 구조를 파헤친 ‘대통령의 성공 조건’이라는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정 원장은 박근혜 정부에서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낸 뒤 2016년 20대 총선 때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에서 대구 동구갑 공천을 받아 국회에 입성했다. 그는 국회 헌법개정 및 정치개혁 특위 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다시 한 번 개헌을 위해 몸을 던졌지만 탄핵 정국과 초선 의원의 한계 등으로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정통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사회과학은 물론 철학·문학·역사 등 광범위한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온 그는 우리 현실에 맞는 헌법학 연구에 평생을 매진해왔다.
학문을 넘나들며 깊이를 더한 그의 이력은 2021년 3월 제10대 국학진흥원장 임명으로 이어졌다. 그는 지난해 출간한 ‘그곳, 寺-마음과 마음 사이를 거닐다’에서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행복하게 살다가 편안하게 죽는 것”이라며 “헌법이란 이런 삶을 만드는 가치와 제도에 대해 정한 국가의 최고 규범”이라고 자신의 화두를 이어갔다.
△1957년 경북 경주 출생 △서울대 법학대학 졸업 △경희대 법학과 석사 △연세대 법학과 박사 △서울대 법학부 교수(1999~2016) △제3대 안전행정부 장관(2014) △초대 행정자치부 장관(2014~2016) △제20대 국회의원(대구 동구갑)
노지운 기자 erased@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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