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시간관념 배달하는 라이더… 속도경쟁 강요받는 ‘우리’ 담아”

박동미 기자 2024. 9. 13. 09:0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 ‘딜리버리 댄서의 선’ 선보인 미디어 아티스트 김아영
AI 등 활용한 27분짜리 영상물
시·공간 넘나드는 라이더 통해
시간 싸움 매진하는 세상 비판
대형스크린 3개 공중설치 압도
해외 미술계 “꼭 봐야할 전시”
세계적 큐레이터 오픈런 하기도
혁신·창조적 예술가에게 수여하는 ‘2024 ACC 미래상’의 첫 수상자 김아영 작가. 지난 6일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복합전시관에서 만난 김 작가가 신작 ‘딜리버리 댄서의 선:인버스’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공

광주=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라이더 복장에 헬멧. 긴 머리를 휘날리며 과학소설(SF) 같은 도시를 질주하는 두 사람. 이들은 시공간이 뒤얽힌 ‘가상 서울’의 택배 기사들. 21세기 ‘속도 경쟁’의 표상인 이들은 달리고, 만나고, 싸운다. 치열하고 측은하고 애틋하게. 그 몸짓이 ‘춤’처럼 보이는 순간, ‘딜리버리 댄서의 선:인버스’라는 다소 생경했던 제목이 호기심으로 바뀐다.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이하 전당)이 선보이고 있는, 미디어 아티스트 김아영(45)의 신작 영상이다.

혁신·창조적 예술가에게 수여하는 ‘2024 ACC 미래상’의 첫 수상자 김아영 작가. 지난 6일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복합전시관에서 만난 김 작가가 신작 ‘딜리버리 댄서의 선:인버스’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공

“우리 모두 ‘비인간적’인 속도를 요구받고 있잖아요. 끊임없이 우리의 모든 행위가 생산적이고 효율적이라는 걸 증명해야 하고요. 종용당하고, 휩쓸리고, 떠밀리죠.” 지난 6일 전당 내 전시관에서 만난 김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즉, 작품은 경쟁 가속주의를 꼬집고, 효율 극대화를 추구하는 사회를 빗댄 이야기다. 그러나 무겁진 않다. ‘배달’(딜리버리), ‘춤’(댄서)이라는 각각은 익숙하지만, 조합하면 낯설어지는 단어들이 신선한 감각과 흥미를 유발해서다. 영상 그 자체로 재미가 충분하다. 작가는 “평소 좋아하는 SF, 웹툰, 웹소설의 특징을 많이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고급·하위라는 문화의 계층이 거의 무너졌고, 나 역시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소비하는 경향이 있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작가가 ‘서브 컬처’적 요소들을 무게 있는 미술 공간으로 가져오고, 이를 즐기게 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게임엔진 기반 컴퓨터 그래픽과 생성형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영상은 애니메이션, 혹은 서사 중심 게임을 관전하듯 27분을 훅 하고 삼켜버린다. 우리 각자 ‘딜리버리 댄서’임을 자각하게 하며….

김 작가는 ‘2024 ACC 미래상’의 첫 회 수상자가 되면서 이번 전시제작 지원을 받았다. 영상, 사진, 게임, 가상현실(VR), 퍼포먼스 등 다양한 방식과 형태로 자신의 세계를 단단하게 다져 온 그는, 최근 글로벌 아트신에서 가장 ‘핫’한 작가다. 지난해 글로벌 아트페어(미술품 장터) 프리즈 런던에서 국제적 명성의 현대미술가 양혜규의 초청으로 개인전을 열었고, 이번 신작의 기본 설정을 빌려준 전작 ‘딜리버리 댄서의 구’(2022)로 세계 최대 미디어 아트상(프리 아르스 일렉트로니카)에서 한국인 최초로 최고상(골든 니카상)을 받았다. 이후 모마(뉴욕현대미술관) 상영에서 호평을 받았고, 작품은 현재 영국 테이트모던이 소장했다.

영국의 저명한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오른쪽)가 자신과 김아영 작가를 직접 촬영한 사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공

경계와 한계를 부수며 질문하는 ‘현대미술’에서도 미디어 아트는 가장 급진적인 예술 언어를 실험한다. 전시는 규모에서부터 도전적인데, 우선 전시관이 1560㎡라는 크기로 압도한다. 이 넓고 높은 곳에, 가로 11m 대형 스크린 세 개가 ‘공중부양’하듯 삼각형으로 설치돼 같은 듯 조금씩 다른 세 편의 ‘딜리버리 댄서의 선’을 발신한다. 지난 8개월간 온전히 이 전시에 몰두했던 작가는 “첫 수상자여서 좋은 본보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이 컸다”면서도 “음향과 조명의 수준, 공간의 크기 등 전당 설비들이 너무 훌륭해서 행복하게 작업했다. 창작자에게 귀하고 드문 기회다”고 작업 과정 소회를 밝혔다.

‘딜리버리 댄서의 선’의 전개에 가장 중요한 축은 ‘시간’이다. 전작에서 ‘시간 지연’ 현상으로 미로에 빠졌던 라이더들은 신작에서 또 다른 충돌과 갈등을 맞이한다. 더는 사용하지 않아 ‘소멸된’ 과거의 시간 체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 예컨대, 역법(歷法)과 실제 계절의 순환을 맞추기 위해 ‘여분의 달’을 끼워 넣는 한국의 ‘윤달’ 개념 등이다. 라이더들은 이러한 ‘과거의 시간관념’을 ‘배달’하며, 다른 시간으로 인해 다르게 형성된 세계를 오가게 된다. 그러니까 작가는 인류가 ‘시간 싸움’에 매진하게 된 원인을, 효율의 극대화를 ‘선(善)’으로 삼는 ‘근대적 시간관’의 부작용으로 보는 것이다. 그는 “‘GPS가 없던 시절엔 어떻게 시공간을 판별했지’ 하는 호기심이 일었다”면서 “스마트폰이 아니라, 하늘을 보고 달과 별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삶을 상상했다”고 작업 동기를 밝혔다. 나라마다 고유의 역법과 나름의 시간 계산법이 존재했음을 알았고, 이것이 그동안 탐구해 온 비서구적 시각, 아시아의 미래성 등과 결합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철도산업 발달로 인한 속도 관념, 전 세계가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양력(그레고리력)이 아니라면, 어쩌면 이렇게 바쁘고, 납작한 삶을 살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속도, 다른 세계를 살았겠죠.”

혁신·창조적 예술가에게 수여하는 ‘2024 ACC 미래상’의 첫 수상자 김아영 작가. 지난 6일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복합전시관에서 만난 김 작가가 신작 ‘딜리버리 댄서의 선:인버스’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공

이날 인터뷰는 해외 유력 미술계 인사들의 깜짝 방문으로 여러 차례 중단됐다. 세계 미술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영국 서펜타인 갤러리 예술감독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는 ‘오픈런’으로 전시를 관람했다. 이어, 발렌틴 우만스키 런던 테이트모던 큐레이터가 찾아왔다. 초청도 아니고, 예고도 없던 ‘깜짝’ 방문. 특히 오브리스트는 이날 하루에만 김 작가의 전시장에 세 차례 다녀가며 뜨거운 관심을 표했다. 실제로 프리즈 서울과 광주·부산 비엔날레를 계기로 방한한 미술인들 사이에서 ‘꼭 봐야 할 전시’로 가장 많이 회자됐다는 후문이다.

손님들을 반기며 조금 달떴던 김 작가는 평소엔 외출도 약속도 잘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옥타비아 버틀러의 SF와 보르헤스의 책을 읽고 또 읽고, 좋아하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한 번 더 본다. 깊게 침잠할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고 작업실과 도서관을 출퇴근하듯 규칙적으로 오간다. “혼탁한 도시에 오래 노출되면 작업도 혼란스러워져요. 미디어 아티스트로서 급변하는 세상과 기술을 감지해야 하지만, 사실은 정신화, 의미화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죠. 그래야 간신히 예술로의 ‘어떤’ 가치가 싹트거든요.”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