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밭춘추] 봉숭아꽃물

2024. 9. 1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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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꽃잎이 분분하다.

한 계절이 또 다시 가고 있다.

벙그는 꽃의 둘레가 소복한 볕을 담아 타오르면 우리는 모여 앉아 바지런히 꽃잎을 모았다.

납작한 돌 위에 백반과 소금을 올려 놓고 매끈한 돌자루로 잘자근히 찧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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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혜 시인

지는 꽃잎이 분분하다. 한 계절이 또 다시 가고 있다. 작살처럼 내리꽂히던 햇살에 꺾인 채, 봉숭아꽃이 흙으로 내려 앉는다. 노인정 앞 뜨락에 순분 언니가 서성거리는 것 같다. 큰집 맏이 순분 언니는 동기 간을 보듬는 마음 품이 스란치마처럼 넓었다. 세상을 떠난 지 달포가량 지났는데…순간 무르춤하여 하늘을 바라본다. 바람결 사이 고추잠자리 날갯짓조차 소슬하다. 사라지며 차오르는 시간인 듯 그림자 손을 잡고 세월의 나이를 헤아린다.

봉숭아꽃은 해마다 제철이면 장독대 가장자리를 따라 주춤거리며 자랐다. 장맛비를 피해 앙징스레 꽃봉을 달았다. 벙그는 꽃의 둘레가 소복한 볕을 담아 타오르면 우리는 모여 앉아 바지런히 꽃잎을 모았다. 납작한 돌 위에 백반과 소금을 올려 놓고 매끈한 돌자루로 잘자근히 찧었다. 양손을 부채처럼 펼쳐 순분 언니 무릎에 올려 놓고 기다리면, 손톱 위에 잘근한 꽃옹심이를 대고 비닐 조각으로 감싸 무명실로 살뜰히 묶어 줬다.

하룻밤 지나면 된다고 일러줬다. 생각만으로는 열 밤인 듯 지루해 손가락 끝이 근질거렸지만, 눈 감으면 금세 잠으로 빠져들었다. 이튿날 동이 트면, 방안 가득찬 빛으로 먼지는 부산했다. 손톱을 감쌌던 봉지들이 반짇고리에서 나온 골무처럼 머리맡에 뒹굴었다. 눈꼽재기를 떼기도 전에 손톱을 살피며 언저리 우중충한 얼룩색이 낯설어 두리번거렸다. 순분 언니는 마주 잡은 내 두 손을 감싸주며 괜찮다고 했다. 몇 밤이 지나면 예쁜 색이 남는다고 일러준 말은 틀림없었다.

내 열 손가락 손톱에는 투명하리만큼 곱고 선명한 꽃물이 들었다. 거뭇한 언니 손톱이 석연찮았으나, 잠깐씩 그뿐이었다. 성하(盛夏)의 나날은 가득찬 초록으로 넘실거렸다. 뒷마당을 지나 종종걸음이 닿는 채마밭 먹거리는 언니 손을 거쳐야 했다. 호박잎에서 풋고추, 깻잎이 그득한 터에서 잎을 따거나 줄기를 솎아 거둬 들였으니, 성긴 풀물이 켜켜이 쌓여 꽃물을 덧칠했다. 어둠이 둥글게 내려 앉은 엄지와 검지 손톱에 봉숭아꽃물이 그믐처럼 숨어 있었다. 하인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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