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엔 피해자, 지금은 생존자, 미래엔…조력자 되고 싶어요” [더 이상 한명도 잃을 수 없다]

김정화 기자 2024. 9. 13.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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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여전히 피해자를 탓하는 ‘당신’ 에게
교제폭력으로 목숨 잃을 뻔한 김지영씨
“같은 경험자들에게 알려주고, 증명하고파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행복할 수 있다고”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힘들었지만 이별을 잘 이겨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뒤 그 남자가 내가 다른 남자와 양다리를 걸친 게 아니냐고 추궁하더니, 차에 태워 욕설을 퍼부으며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집으로 끌고 가 목을 조르고, 뺨을 때리고, 발길질했다. 식칼을 가져와 겨누고 찌를 듯이 위협했다. “내 손으로 너를 죽이겠다”고 계속 소리를 질렀다.

교제 폭력 피해 생존자 김지영씨(가명)가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기 전 한 공유오피스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이 세상에 나를 죽이려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무섭다. 하지만 더 이상 그 두려움에 더이상 사로잡히지 않고, 담대하게 일상을 이어나가고 싶다”는 소망을 전했다. 김창길 기자

김지영씨(가명)는 자신의 이야기를 ‘가장 보통의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몇년 전, 전 연인에게 목숨을 잃을 뻔한 교제폭력 피해 생존자다. 가해자는 1심에서 징역 3년형을 받아 감옥에 갔다. 지난 6일 만난 그는 “사건 직후엔 ‘내 잘못’이라며 오랫동안 자책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들이 많았다”며 “아직도 피해자를 탓하는 사람들에게 ‘온전히 가해자의 잘못’이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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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의 행동을 비난하는 사람보다
스스로를 돌아보라 힐난했던 사람들

그날 이후 모든 순간이 또 다른 피해의 연속이었다. 폭행 당시 김씨는 겨우 도망쳐 신고했다. 당시 김씨는 귀에서 피가 흐르고 온몸에 타박상이 생기는 등 현장에 출동한 구급대원이 응급치료가 필요하다고 할 정도로 심각했다. 그런데 경찰은 치료도 하지 못한 피해자를 그대로 데려다가 조사했다. 어떤 기관에서 도움받을 수 있는지도 안내해주지 않았다.

경찰은 교제 관계였던 상대방을 ‘남편’이라고 지칭하는가 하면 “우리는 당신을 억울하지 않게 해줘야 하지만, 상대방도 억울하게 하면 안 된다. 이해해달라”고 했다. 가해자가 재판에 넘겨진 뒤 그의 지인들은 법정에 몰려와 “어떻게 피해자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냐” “여자 판사라서 편들어준다”고 했다.

주위 사람들은 가해자의 행동을 비난하는 대신 스스로를 돌아보라고 했다. “네가 먼저 좋은 사람이 돼서 사람 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 “최고의 복수는 네가 잘 사는 거다”부터 “우리 엄마, 할머니 때는 더 많이 맞고 살았다”고 한마디씩 보탤 때마다 그는 완전히 혼자라고 느꼈다. 당시 회사를 다니고 있었지만 결국 제대로 업무를 할 수 없게 돼 도망치듯 퇴사했다. 실업급여도 받지 못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진단을 받은 김씨는 극심한 우울증으로 반년간 집 밖에 나가지 못했다. 살도 급격히 쪘고 일상생활은 불가능했다. 그는 “폭행 이후에도 이리저리 얻어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치욕스럽다고 느꼈고, 차라리 신고를 안 했다면 편했을까 후회했다”고 했다. 제일 아쉬운 점은 어디에 도움을 요청해야 할지도 몰랐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나를 죽이려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지금도 내 안의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난 느낌이에요. 나와 함께 분노하거나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너무 외롭고 괴로웠어요. 카카오톡에서 피해자 모임 오픈채팅방을 들어가 기웃거리기도 하고, 자살 충동이 들면 생명의전화에 울면서 전화했어요. 처음부터 여성긴급전화 1366 팸플릿이나 여성 폭력 피해 관련 책자 하나라도 받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나’라는 사람이 완전히 망가진 듯한 기분, 이 상처는 너무 깊어서 도저히 나을 것 같지 않다는 절망감에서 혼자 벗어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런 그를 다시 세상으로 나올 수 있게 도와준 건 또 다른 피해자들이었다. 그는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성폭력 전문상담원 교육 과정’을 우연히 알게 돼 수강했고 강의를 들으며 시각이 완전 바뀌었다. 김씨는 “인생에서 제일 잘한 일 중 하나”라고 말했다.

성폭력상담소에서 수년째 진행하는 이 교육은 100시간에 걸쳐 여성학부터 상담학, 성폭력 관련 법과 수사·재판 절차, 쉼터 지원 체계, 성폭력 상담 실습 등을 두루 배운다. 실제 법원 재판을 참관하는 시간도 있다. 김씨는 “법정 분위기를 사전에 볼 수 있었던 게 이후 피해자 증인신문에 참석할 때 큰 도움이 됐다”면서 “그게 아니었으면 너무 떨어서 말도 제대로 못했을 것”이라며 웃었다.

“강의를 들으며 젠더 기반 폭력이 뭔지 이해하게 됐고 과거에 당한 직장 내 성희롱도, 전 연인의 폭행도 내 잘못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여러 피해 사례를 공부하면서 ‘내 일이 보편적인 사건 중 하나구나’ ‘나와 비슷한 사람이 많고, 우릴 지지하는 사람도 많구나’ 깨닫게 됐고요.”

자책하지 않고 홀로서기 시작
“과거엔 피해자였지만 지금은 생존자,
앞으로는 승리자, 조력자가 되고 싶다”

현재 그는 끝없이 자책하고 고통에 사로잡혔던 과거에서 벗어나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김씨는 올해 초부터 온라인 화상 수업 사이트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틈틈이 책 번역 작업도 한다. 원래 외국계 기업에서 일할 정도로 영어 실력이 뛰어났고, 전략·기획 업무를 해왔다. 피해 직후 김씨는 병원 입원비, 치료비, 변호사 선임 비용 등으로만 2000만원 정도를 썼다. 지금도 트라우마 치유 상담을 계속 받고 싶지만 고정 수입이 없어 어렵다. 이 때문에 화상 강의를 시작한 직후엔 ‘빨리 돈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에 매일 12시간 넘게 일했다. 사건을 떠올릴 틈도 없이 일에 몰두한 건 좋았지만, 그만큼 금세 소진됐다. 그는 “50분 수업, 10분 휴식이라는 빡빡한 스케줄이 하루 종일 반복되니 쉬는 시간에 눈물이 주르륵 흐르더라”며 “지금은 일단 꾸준히 하자는 목표로 내 페이스에 맞게 강의 수를 조절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나마 이렇게라도 할 일이 있다는 게 감사하다”고 했다.

교제폭력 피해자인 김지영씨(가명)가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김창길기자

아무리 일대일, 소규모 그룹 강의라지만 온라인에서 얼굴을 드러내는 게 불안하진 않을까. 김씨는 “솔직히 100번 넘게 고민했다. 그렇지만 평생 숨어 살 수는 없지 않으냐”며 “예전엔 내 피해가 수치스럽다고 느꼈지만,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그 사람과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인생의 다음 챕터에선 담대하게 살고 싶다”고 말했다.

강의가 누적되면서 수강생들의 리뷰도 수백개로 늘어났다. “진행이 체계적이어서 이해하기 쉽고,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한다” “지인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수업”이라는 평가를 읽다 보면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진다. 피해 직후 그는 ‘나는 불쌍하고,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목을 졸리고 발로 밟히던,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은 기억에서 벗어나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그런데 이렇게 인정받는 경험이 쌓이면서 아주 조금씩, 내가 흔들리지 않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다음 목표는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김씨는 “가족, 친구, 직장을 다 잃고 완전히 고립됐는데, 성폭력상담소 교육을 통해 나를 다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됐다”고 말했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큰 도움이 됐던 변호사처럼 법 전문가가 되든, 타인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상담가가 되든, 아니면 여성 폭력 피해 지원 기관에서 돕든, 그의 미래엔 이제 새로운 선택지들이 생겼다.

“그래도 이렇게 살아 있잖아요. 과거엔 피해자였지만 지금은 생존자라고 생각해요. 앞으로의 꿈은 승리자, 더 나아가 조력자가 되는 거예요. 내가 혼자여서 겪었던 아픔을, 다른 이들에겐 ‘그럴 필요 없다’ ‘네 잘못이 아니다’라고 꼭 말해주고 싶어요.”

▼ 김정화 기자 clean@khan.kr

김정화 기자 cle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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