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연의 산모퉁이 돌고 나니] 사랑, 그 영혼의 공명
작품전에 초대를 받았다. 정미연 작가의 ‘무명 순교자를 위한 진혼곡’이다. 절두산 순교자 성지에서 열렸다. 거룩한 사랑이었다. 그 자리에서 뜻밖에 염수정 추기경님을 뵈었다. 초면인지라 인사를 드리며 악수했다.
놀라웠다. 농부의 손처럼 두툼했다. 아니 평창 산골 농부보다 더 크고 거칠기만 하였다. 나는 최소 일주일에 사나흘은 풀을 뽑고 노동을 한다. 그러한 내 손보다 훨씬 거칠었다. “이 무슨 일일까? 일상을 어떻게 사시는 것일까? 노동 외에도 설거지 청소 일상을 친히 다 하시는 것일까? 법정 스님도 생전 말년까지 그리 하셨다 전해온다. 무엇이 참이며 진리일까? 무엇이 겸손한 삶이며, 거룩한 삶일까?” 나는 개신교 목사이고 이전에 뵌 일이 없던 어른이지만, 짧은 인사 중에 이렇게 많은 생각이 스쳤다.
나는 개막 행사 후 작품을 보며 순교에 대해 묵상했다. 다른 행사장으로 옮겨가는데 안내하는 신부님이 추기경님과 동행토록 배려하셨다. 함께 잠시 나무가 우거진 길을 묵상하며 걸어 내려갔다. 짧은 대화가 오갔다. 그분의 나를 대하는 마음의 자세가 나보다 더 낮고 넓었다. 얼마 후, 그분으로부터 세상을 넘어, 예수 한 분으로 족한 삶에 이른 존재의 위엄과 깊이와 넓음이 전해왔다. 나는 내가 찾아 들고 싶었던 담장 너머의 집에 살고 계시는구나 했다. 그리고 이내 내게도 그곳의 문이 열렸다. 이것이 바로 영적 공명이 주는 은혜일까!
칼라일과 에머슨의 만남이 떠오른다. 두 철학자는 편지로 교제하였다. 그러던 중 에머슨은 미국에서 대서양을 건너 스코틀랜드 숲속 외딴곳에 사는 칼라일을 찾아갔다. 그들은 기쁘게 만났지만, 말이 없었다. 숲속에서 토론보다 깊은 침묵 중에 시간을 보내고 헤어졌다. 그 침묵의 교제는 그들에게 일생 잊을 수 없는 감동과 배움을 주었다고 서로 고백한다. 대화보다 더 깊은 소통, 말로 다 표현될 수 없는 진리를 그들은 침묵으로 소통한 것이다. 아니 침묵 말고 어찌 깊은 영혼의 공명이 가능할까!
세상의 갈등과 불통은 낱말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너무 말이 넘치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 사랑과 진실 없는 부도난 낱말들이 유통되고 있기 때문이리라. 진실에 이른 침묵보다 더 깊은 소통이 이 하늘 아래 그 어디에 있을 수 있을까.
9월 1일 새벽, 나는 큰 은총을 입었다. 일생의 물음과 고통이 사라졌다. 나는 이렇게 기록했다. “주님이 사랑으로 내게 오셨다. 그분은 사랑이셨다. 그렇다! 주는 사랑이시라. 주께서 사랑으로 내게 오시기 전까지 내겐 안식이 없었다.” 선행이나 좋은 인간의 관계나 의를 위해 나를 불태워도 얻지 못하던 사랑이 임하셨다.
사랑은 관념도 논리도 아니다. 내가 그 어떤 행위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존재적 실재이다. 창조주에게서 시작된 것이며 그분께서 주시는 것이다. 향나무엔 향이 있고, 향은 향나무에 있듯, 주는 사랑이시고, 주로부터 사랑이 온다. 목마른 사슴처럼 시냇물을 찾던 내 영혼에 사랑의 본체이신 그분이 사랑의 공명으로 오셨다. 이젠 죽어도 좋다. 오라, 은혜로 살 뿐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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