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외국인이 'K사상'을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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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와 K컬처가 세계적인 관심을 받는 건 해외에 잠시라도 나가 보면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저 멀리서 갑자기 어느 외국인이 제게로 헐레벌떡 뛰어와 “한국분이세요?”라고 한국말로 묻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재밌는 건 인터넷에서 보면 중국인이 해외에서 똑 같은 일을 겪는 경우도 있다는 겁니다. 예전 1990년대에는 “일본 사람이냐”고 묻는 일이 많았던 걸 생각하면 격세지감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외국인들의 관심은 K팝이나 K드라마를 넘어서 점차 ‘K사상’ ‘K철학’에 이르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외국인이 “당신 나라 사상(思想)의 핵심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인가요?
이제 이것이 하나의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 사상의 요체는 인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인존사상(人尊思想)을 바탕으로 한 공존(共存) 공생(共生)의 휴머니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얘기인 듯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사람보다 신(神)의 존재를 중시하는 신본주의, 물질을 더 중시하는 물질만능주의와는 애초에 뿌리부터 다른 사상이 한국의 전통이라는 것이니까요. 결국 이 전통을 잊고 잃어버리는 지경이니 일각에서 사이비 종교가 횡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한국철학 연구자 중 최고 원로인 윤사순(88) 고려대 철학과 명예교수입니다. 그는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이기도 합니다. 지난 2월 한국공자학회 학술회의 ‘사관(史觀): 한국철학사를 보는 눈’에서 발표한 기조강연문 ‘한 미숙한 한국철학사관’에 이 얘기가 요약돼 있습니다.
이 글은 21세기에 한국 철학의 역사를 어떤 거시적 시각으로 봐야 할 것인가에 대한 시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관이란 ‘역사의 발전 법칙에 대한 체계적인 견해’(표준국어대사전)를 말합니다. 윤 교수는 발표 원고에서 지난 세기 한국을 풍미한 사관은 민족주의 사관과 유물사관의 양대 사관이지만, 두 사관은 이념의 대립으로 편향돼 사실을 소홀히 여기고 이념적 소망에 따라 허구로 그릴 수 있는 폐단을 낳게 됐다고 지적했습니다.
“민족주의는 이제 효력 상실의 시점에 이르렀다고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피침자가 겪은 고난의 역사 속에서 자기 생존의 수단으로 모색한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타민족에게 위해를 끼치지 않고 민족의 단합을 기하려 했다는 점에서 유효했으나, 통일은 민족주의 복원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국제화와 다문화 형성의 시대에는 더 이상 맞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지금 한국철학사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윤 교수는 한국철학의 특징을 실증적으로 고찰했습니다.
①한국의 신화(神話)를 분석하면 정작 신(神)의 세계와 그들의 이야기가 없다. 현세의 인간 중심, 인간 본위 사유가 강하다. 단군신화의 단군은 하늘의 아들이며 그의 후예인 한국인은 천손(天孫)이다. 이것은 인간을 근본으로 삼는 인본(人本) 사상보다 더 수위가 높은 인존(人尊) 사상, 즉 인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상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등장하는 철학적 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은 결코 선민의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널리 다른 나라의 인간들까지 이롭게 한다는 점에서 세계인과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이념이 된다.
②한국 불교철학은 임진왜란 때 승병의 활동에서 알 수 있듯, 무고한 인간에 대한 침략자의 살상을 막는 인존정신을 구현했다.
③한국 유학은 성리학자들이 도덕의 올바른 파악과 실천을 중시하며 인간의 가치 구현 철학을 추구했다. 인존정신에서 더 나아가 ‘인존의 이유’까지 파악했던 것이다.
윤 교수는 “한국철학사의 특징은 다름 아닌 ‘인존사상’이었다”며 “경험적 사실로 이뤄진 사상인 데다가 보편성과 실용적 타당성을 담지했다”고 했습니다. 또한 이것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휴머니즘’을 바람직한 이념의 얼개로 삼을 수 있는데, 세계인 및 자연과 함께 어울리며 재난, 전쟁, AI 등 과학기술이 초래할 위험에서 인간을 보위할 공존·공생의 철학이라고 했습니다.
2013년에 윤 교수가 1200쪽 분량의 ‘한국유학사’를 출간했을 때 삼선동 자택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과 답변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유학은 망국의 학문이라고들 한다.
“망한 나라의 통치 원리였기 때문에 망국의 원한을 유학에 둔 것이다. 세도정치가들에게 어디 위민(爲民)의 정신이 있었나? 오히려 유학 정신을 잊어버려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이 책은 ‘한국 유학의 특수성’에 주목했다. 하지만 한국 유학은 중국 유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아류로 평가되지 않았나?
“다카하시 도루(高橋亨) 같은 일본인이 조작한 ‘한국사상 부재론’의 영향일 뿐이다. 한국 유학은 중국 사상이 아니라 우리가 독창적으로 개발한 한국 사상이다. 중국 유학을 넘어서는 뛰어난 성취는 열 가지도 넘는다.”
―좀더 설명해 달라.
“인(仁)의 정신을 실제로 ‘효’와 ‘인정(仁政)’으로 구현한 것에 한국 유학의 특징이 있다. 군주가 독선에 빠지지 않도록 견제하는 삼사(三司) 기구는 중국에도 일본도 없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두려워하지 않는 충언과 직간의 전통도 빼놓을 수 없다. 선비의 언로(言路)가 보장된 사림 정치, 일반 백성의 뜻을 모은 공론(公論)이라는 개념 역시 한국 유학에서만 나타난다. 이것은 실학자들에게 오면 민생을 풍요롭게 하는 후생(厚生)으로 연결되고, 이들이 노비 제도의 폐지를 주장하는 국면에 이르러서는 현대적인 인권·평등 사상과 접하게 된다.”
―그렇다면 의(義)의 원리는…
“역시 한국에선 독특하게 전개됐다. 그 의리관은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에서 정점을 이뤘고, 팽창이나 침략과는 거리가 먼 민족주의로 진화됐다. 한말 의병에 오면 군왕이 아니라 ‘민생에 대한 의’로 변모한다.” ―그렇다면 허례허식으로 비판받는 예(禮)는 어떻게 봐야 할까. “예는 개인의 품격을 높이고 사회 질서의 기틀, 문화의 내실화를 이루는 것으로 재해석해야 한다.”
―마지막 질문. 유학의 관점으로 봤을 때 현재 한국의 정치는 어떤가.
“사욕이야 그다지 없어 보입디다. 그런데 이거야 원, 언로가 너무 막혀서 말이지. 직언도 직간도 없고…. 이거 참.”
그것은 11년 전의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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