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문학창작실 바깥에서

2024. 9. 12.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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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작가 열악한 환경서 작업
최근 전국에 공유오피스 마련돼
문학창작 공간 지원 반가운 소식
이마저 탈락한 이는 박탈감 클 듯

한가위 다가오니 마음이 일렁인다. 고향에 못 가도 부친 묘소엔 다녀올 예정이다. 언제 오냐며 기다리는 이도, 찾아갈 집도 없는 사람들이 있다. 지구상에서 7인 중 1인은 집이 없어 노숙하거나 비닐하우스, 빈집 등에 거주한다는 통계를 봤다. 세계적으로 무단거주자가 10억명 넘는다고 한다.

며칠 전까지 나는 류블랴나에 있었다. 슬로베니아에서 열린 국제시축제에 초청받아 행사 마치고, 사나흘 그 나라 수도에 머물렀다. 내게 제일 맘 편해지는 해외도시를 꼽으라면 서슴없이 류블랴나라고 말한다. 9년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파견작가로 3개월간 살았던 데다, 다정한 사람들이 사는 아름답고 작은 도시이기 때문이다. 내 고향처럼 도심으로 강물 흐르고 강가에는 날마다 아침 장이 선다.
김이듬 시인
8월 하순의 류블랴나도 서울 못지않게 더웠다. 그날 일찍 장터로 걸어가 토마토와 오이, 치즈, 통밀빵을 사와 재빨리 식사했다. 그립고 걱정되는 작가를 만나려고. 자신의 이상한 시집을 내게 선물해준 슬로베니아 시인이었다. 10년쯤 세월이 흘러 이름을 잊어버렸지만, 나는 그녀를 금방 알아볼 것이다. 프레셰렌 광장을 지나 구시가지로 뛰어갔다. 그녀가 살던 집을 찾아 아무리 헤매도 보이지 않았다.

한 청년에게 물었다. “이 근처에 예술가들이 잔뜩 모여 사는 큰 건물이 있죠? 어디쯤이에요?” “난 이 동네 사정을 통 몰라요. 직장 동료네 놀러 온 거라서요.” 외따로 앉은 노인에게 물어보니 ‘바로 저기’라며 손으로 가리켰다. 거긴 굉장한 최신식 빌딩이 있었다. 벽면이 온통 투명한 유리라서 내부가 확연히 보였다. 2층 긴 복도에 서서 대화하는 사람들, 그 위층엔 노란 소파에 앉아 책을 보는 사람들, 5층 복도 끝으로 커피잔을 들고 조심스레 걷는 사람 등.

나는 빌딩 문을 밀고 들어갔다. 청결한 실내는 에어컨 시설이 잘 작동되어 쾌적했다. 그라피티, 목공예, 유리공예, 요리, 가드닝, 뜨개질 등 수많은 클래스룸이 있었다. 완벽하게 바뀐 공간이었다. 예전에 방문했을 땐 가난하고 집 없는 예술가들이 모여 살며 작업하고 있었다. 독특한 분위기의 작가들이 개성을 뽐내며 자유로이 생활하는 느낌이 신선했다. 벽면엔 아나키스트적인 문구들이 적혀 있었지만 그들 나름대로 질서가 있었다. 자신의 그림엽서를 파는 화가, 자신의 곡을 틀어놓고 음반을 파는 뮤지션도 있었다. 연극 공연이 있던 방 통로에서 만났던 이는 내성적이고 왼쪽 다리가 불편한 시인이었다. 균열 심한 벽 아래 좁은 공간에서 몇 권의 노트에 자작시를 정성껏 필사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게 자신의 시집이라고 했다.

오랫동안 스쾃이었던 그곳이 작년 가을 행정당국에 의해 철거되고 시립아트센터로 재탄생한 것이다. 그러니까 류블랴나 시립아트센터의 전신은 집 없는 예술가들 공동의 터전. 그 이전에는 ‘ROG’라는 자전거 공장이었는데, 그 대형 공장이 파산하면서 비어 있던 건물에 한 명, 두 명, 점차 수많은 예술가가 들어가 20여년 살다가 몇 달 전 거기서 추방된 것. 끝내 나는 가난하지만 아름다웠던 그 시인을 찾지 못할 것 같다.

“한 명의 여성 작가가 글을 쓰려면 얼마간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말이 버지니아 울프의 입에서 나온 지 100년쯤 되어간다. 하지만 여태 대다수 작가는 돈과 방이라는 두 가지의 집필 조건을 못 갖고 있다. 내 친구 작가들과 만나면 농담 삼아 스쾃이라도 찾아보자는 말이 떠돌았다.

친구여, 너의 방은 어디인가? 새롭고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비록 자기만의 방은 아니지만, 창작 환경이 조성된 공유오피스가 전국에 73개 마련되었다. 아르코에서 처음 시행하는 ‘2024년 문학창작실이용지원사업’이 그것이다. 한국 작가 과반수가 겸업 종사하는 현황을 고려하여 업무와 집필활동을 병행할 수 있는 공간을 안정적으로 지원해준다는 것이다. 모집 인원은 총 400명, 공간에서의 창작활동 결과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하지만 서울 경기 지역에 거주하지 않는 작가, 공모에 선정되지 못한 작가들의 경우는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지. 오늘도 퇴근 후의 어이없는 9월 열대야를 헤매지 않을지.

김이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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