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아의 할매 열전]날쌘돌이 큰어매
어느 봄날의 풍경 하나. 아마 어린 날의 기억인 것 같은데 내가 어디에서 이 풍경을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큰집의 넓은 뜰 안쪽에만 봄볕이 가득하다. 아마 이른 아침인 모양이다. 반내골은 앞뒤 산이 가팔라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는 전형적인 산골이었다. 암탉 한 마리가 샛노란 새끼 10여마리를 거느린 채 종종걸음으로 어둔 그늘을 벗어나 봄볕 쪽으로 이동한다. 신기하기도 하지. 닭은 부리며 발이며 참으로 못생겼는데 병아리들은 몇달 뒤의 역변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어여쁘다. 암탉은 햇볕 좋은 자리에 자리를 잡고, 이제 조금 자라 엄마 품을 벗어난 병아리들은 엄마 몸에 기댄 채 자울자울 잠을 청한다. 거기서 머지않은 펌프 옆, 큰엄마가 볏짚 몇 가닥에 양잿물을 묻혀 타구(唾具)를 닦고 있다. 여느 때처럼 큰엄마는 눈·코·입이 오종종한 작은 얼굴을 찌푸린 채 속사포처럼 혼잣말을 내뱉는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 들리지 않는데 중간중간 썩어빠질, 염병 같은 욕설이 들린다. 큰엄마가 닦는 타구는 큰아버지의 것이다. 큰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이었다. 내가 좀 큰 뒤에는 안방 옆의 작은 방에 틀어박힌 채 허구헌날 술만 마셨다. 큰아버지가 머무는 방문을 열면 독한 담배 냄새와 오줌 냄새, 술 냄새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조는 병아리들을 봤던 그 봄날에 나는 타구가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도 알지 못했다. 타구가 침 뱉는 그릇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리듬을 타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큰엄마의 욕설을 뼛속 깊이 이해했을 텐데….
큰아버지가 밤새 위아래로 토해놓은 분비물을 닦는 것으로 큰엄마의 아침은 시작되었다. 아들 둘, 딸 넷, 자식들의 뒤치다꺼리며 논농사, 밭농사도 죄 큰엄마 몫이었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날까지 일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다못해 큰아버지 손에 빗자루라도 들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큰아버지 손에 들린 것은 오직 곰방대나 술잔이었다. 큰아버지는 술에 취한 채 땅 위의 세상을 떠나 한평생 구름 속을 헤매다 떠났다. 어떤 슬픔이나 상처 혹은 분노가 이 세상을 버리게 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이가 남겨준 고통이 너무 커 자식들조차 이유를 알려 하지 않았다. 애당초 이유 같은 건 없었을 수도 있다. 양반집에서 태어나 팔자 좋은 유년을 보냈고, 집안이 몰락한 뒤에도 양반의 허세에 갇혀 허우적거린 것일지도.
이유야 어찌 됐든 큰아버지가 버린 땅 위의 세상을 챙긴 것은 물론 큰엄마였다. 큰엄마는 여자 홀몸으로 아들 둘, 딸 넷을 키워냈다. 당연히 쉴 틈이 없었다. 큰엄마는 노상 상체를 앞으로 숙인 채 날쌔게도 걸어다녔다. 키도 작은 데다 상체까지 앞으로 기울어 큰엄마의 걸음걸이는 곧 땅으로 곤두박질칠 듯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큰엄마는 땡초처럼 야물어 좀처럼 아프지도 않았다. 땡초! 그렇다. 큰엄마는 한여름 땡볕에 잔뜩 약이 오른 땡초 같았다.
어느 여름, 반내골에 큰물이 졌다. 우리 집은 고지대인데도 순식간에 불어난 물이 미처 비탈로 빠져나가지 못한 채 마루를 삼킬 듯 너울거렸다. 우리 아랫집인 큰집은 더 난리였겠지. 쨍한 큰엄마의 고함소리가 귀 따가운 빗소리를 뚫고 천둥벽력처럼 내리쳤다.
“어이! 물 쫌 막아보소. 그 집 물이 다 일로 쏟아진단 말이네!”
그 집 물이라니. 그건 당연히 우리 물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불어난 빗물일 뿐. 비탈진 사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물을 망연자실 바라보던 엄마가 헛웃음을 웃었다.
“재주 있으먼 형님이 오셔서 막아보씨요. 나가 무신 수로 아래로 내려가는 빗물을 막겄소?”
물론 몸 약한 엄마의 말은 빗소리에 삼켜져 큰엄마에게 가닿지 못했다. 나는 그때 알지 못했다. 큰엄마에게는 인생이란 것이 그날의 빗물처럼 속수무책으로 밀려드는 고통이었다는 것을. 물을 막으라고 악을, 악을 쓰면서 겨우겨우 살아내고 있었다는 것을. 터무니없는 악다구니라도 퍼붓지 않으면 아들 둘, 딸 넷, 무능력한 알코올 중독자 남편까지, 큰엄마의 등에 아귀처럼 매달린 생명들을 건사할 수 없었다는 것을. 무슨 일로 그리 바빴는지 큰엄마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나는 이만큼 늙어서야 가고 없는 큰엄마에게 죄스럽다. 복 없는 큰엄마는 조카딸에게 밥 한 끼 대접받지도 못했다. 설날이면 수돗가에서 꽁꽁 언 동태 한 박스 손이 곱도록 손질하던 큰엄마 작은 몸피가 눈에 선하다.
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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