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석의 그라운드] 이찬원이 띄우고 태극전사 스매싱...안성소프트테니스 운영도 만점
최근 대한민국 구기종목의 국제경쟁력 저하가 도마에 올랐습니다.
2024 파리올림픽에는 축구, 여자배구 등이 본선 진출에 실패하는 등 구기종목 가운데 유일하게 여자 핸드볼만 출전했지만 이마저도 예선 탈락했습니다. 구기종목의 부진으로 올림픽 열기도 예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TV 시청률도 곤두박질쳤고, 올림픽 특수를 기대한 치맥 업계도 울상이었다고 하네요.
8일 인천 클럽72에서 끝난 제40회 신한동해오픈 골프대회는 외조부모가 한국인이라는 일본 골퍼 히라타 겐세이가 우승했습니다. 이 대회에서 톱10 선수 가운데 7명이 일본인이었던 반면 한국 선수는 2명에 불과해 안방에서 자존심에 생채기가 났습니다.
같은 날 충남 아산에서는 박신자컵 여자프로농구대회 결승이 열렸습니다. 박신자 선생이 누구입니까. 1960년대 아시아를 뛰어넘어 세계 무대에 이름을 날린 농구의 전설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날 주인공은 한국이 아닌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의 후지쓰가 결승에서 도요타를 꺾고 우승컵을 차지했습니다. 지난해 우승팀도 도요타였습니다. 일본 팀에 문호가 개방된 지난해부터 2년 연속 챔피언 트로피가 대한해협을 건너간 거죠. 경기장 이름이 이순신 체육관이었으니... 한국과 일본의 구기종목 경기력 차이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현실에서 확인됐습니다.
하지만 한국 소프트테니스(정구)는 달랐습니다. 안성에서 최근 끝난 제17회 세계선수권대회에서 7개 모든 종목 우승을 노렸던 정구 종주국 일본을 연파하면서 금메달 4개, 은메달 4개 등으로 종합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지난해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4개를 땄던 일본은 금메달 2개에 머물렀습니다.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은 문혜경의 여자 단식 우승이 유일한 금메달이었죠.
<사진> 금메달 4개를 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여자 대표팀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인촌)는 최근 구기종목 부진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내년 예산에서 구기종목에 대한 지원을 늘린다고 하더군요. 문체부는 대한소프트테니스협회(회장 정인선·국제정구연맹 회장, 연세아이미스템의원 대표원장)에게 자문해야 할 것 같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채널에이와 채널에이 플러스가 주요 결승 경기를 중계한 이번 대회는 한국 선수들의 풍성한 메달 잔치 뿐 아니라 역대급 대회 운영이라는 찬사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현장을 지켜본 한 스포츠 산업 전공 교수는 “정구가 올림픽 종목은 아니어도 아시안게임과 세계선수권에서 강세를 보이는 효자 종목이다. 이번 세계선수권을 통해 정구에 관한 관심과 저변이 높아질 것 같다. 최근 떨어지고 있는 한국 스포츠외교의 위상을 다시 끌어올린 성공적인 이벤트였다”라고 평가했습니다.
국제정구연맹도 함께 이끄는 정인선 회장은 “역대 세계선수권대회 가운데 최다 선수가 참가했으며 국제연맹 관계자들로부터 가장 성대한 개폐회식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외국 선수가 (환상적인 대회라면서) 엄지를 세우며 즐기는 모습을 보게 돼 흐뭇했다”라고 밝혔습니다. 정 회장은 또 “아무리 코트 밖 행사가 화려하고 대회 운영이 성공적이었다고 해도 성적도 대회의 중요한 요소인데 한국 선수들이 부담감을 이겨내고 종합우승이라는 뛰어난 성과를 얻어냈다.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이 오랜 시간 탄탄한 팀워크를 유지하며 땀 흘린 결과다”라고 말했습니다.
정 회장의 얘기대로 2011년 문경 대회 이후 13년 만에 국내에서 열린 이번 안성 세계선수권대회는 뛰어난 성적, 깔끔한 대회 운영, 뜨거운 관중 분위기 등 삼박자가 잘 맞아떨어졌다는 찬사가 쏟아졌습니다.
아프리카, 남미까지 포함된 특정 지역에 치우치지 않는 31개국 400여 명의 참가 선수단은 대회 기간 열띤 승부로 코트를 뜨겁게 달궜습니다. 개막 전 개회식 공연도 큰 화제를 뿌렸습니다. 인기가수 이찬원의 공연은 전국에서 몰려든 4000 명 팬클럽 회원들의 열기 속에서 대회 성공을 예감하게 하는 특별한 행사였습니다. 이찬원은 무대 아래로 내려와 해외 선수들과 기념사진 등을 찍으며 파이팅을 격려하는 수준급 매너를 펼쳤습니다.
한국은 이민선(NH농협은행)이 여자 단식 우승으로 첫 단추를 제대로 끼웠습니다. 자칫 초반 답답한 행보를 보일 경우 메달 레이스가 꼬일 수도 있었으나 이민선이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나머지 한국 선수들의 어깨를 가볍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민선은 NH농협은행 동료 이정운과 호흡을 맞춘 여자복식에서도 우승한 데 이어 여자단체전에서도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서며 3관왕의 위업을 이뤘습니다.
간판스타 문혜경(NH농협은행)-김범준(문경시청) 조는 혼합복식 금메달을 합작했습니다. 한국 혼합복식은 세계선수권에서 6회 연속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습니다. 마치 한국 양궁이 올림픽 여자단체전에서 다른 사람의 추종을 불허하듯, 한국은 4회 연속 종합우승을 차지한 2015년 뉴델리 세계선수권 이후 9년 만에 다시 종합우승을 달성했습니다. 직전 대회인 중국 세계 선수권에서 거둔 금메달 2개를 넘어섰습니다.
<사진> 여자복식 우승팀 이민선 이정운 조
반면 역대 최강의 전력이라던 일본은 정구 제왕으로 불리는 우에마쓰 도시키가 남자 단식 우승에 이어 남자단체전 금메달을 이끌며 체면치레했습니다. 일본 여자 정구의 에이스 다카하시 노아는 한국 벽에 막혀 은메달만 3개 따냈습니다.
한국 정구 대표팀은 3월부터 이번 대회까지 6개월 가까이 진천선수촌과 순천, 인천, 안성 등에서 장기 합숙 훈련을 하며 강도 높은 연습을 소화했습니다. 김백수 총감독과 곽필근 여자팀 감독(안성시청), 한재원 남자팀 감독(NH농협은행)은 선수들의 컨디션에 따른 맞춤형 프로그램으로 기량을 끌어올렸습니다. 일본 팀에 대한 철저한 분석으로 상대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습니다. 세계선수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 포상금과 경기력 향상 연금이 제공된다는 점은 선수들에게 큰 동기부여가 됐습니다.
문체부의 구기종목 육성 방안도 그 온기가 실질적으로 지도자, 선수들에게 전해져 경기력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비인기 종목 정구가 오랜 세월 세계 정상의 전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초-중-고-일반의 시스템이 잘 구축돼 있으며 안성 문경 순창 순천 등 지역 기반으로 체계적인 선수 양성이 가능했던 영향도 큽니다.
정구 전력이 약한 외국 팀들에게는 자칫 세계선수권이 ‘그들만의 리그’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2부 리그를 따로 정해 별도의 메달을 시상한 대목도 정구를 글로벌한 스포츠로 이끄는 데 기폭제가 될 수 있다는 기대하게 했습니다.
<사진> 개회식 분위기를 띄운 일등공신 가수 이찬원
이번 대회를 위해 45억 원을 들여 리모델링한 안성 정구장은 코트 8개 면을 지닌 돔구장으로 탈바꿈해 비와 된더위에도 선수들이 정상적으로 플레이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이런 인프라를 통해 정구 도시 안성은 정구의 안성맞춤 성지로 불리게 됐습니다. 안성시(시장 김보라)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정구 대표 출신인 김영옥 협회 부회장 등 엘리트 스포츠와 생활체육 동호인 출신 협회 임원들은 자원봉사자를 자처하며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NH농협은행(은행장 이석용)은 3억 원을 후원해 자칫 예산 부족으로 난항을 겪을 수 있는 대회 운영에 숨통을 트게 했습니다. 라켓 명가 NH농협은행 정구부(단장 장한섭, 감독 유영동) 소속으로 태극마크를 단 문혜경, 이민선, 이정운, 임진아는 모두 금메달을 목에 걸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동아오츠카, 농심, 엑스트라 조스 등은 음료 협찬을 통해 선수, 임원, 심판, 진행요원들의 갈증 해소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정구 국가대표 공식 후원사인 요넥스 코리아(대표 김철웅)는 의류 지원뿐 아니라 부스를 설치했는데 저렴한 가격으로 외국 선수들의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정인선 회장은 “협회 임원과 사무처 직원, 안성시의 유기적인 협조로 원활한 대회가 진행됐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음 세계선수권 장소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이번 안성 대회가 차기 개최지 결정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지 기우를 해봅니다. 이렇게 멋진 대회는 또 나오기 힘들 것 같기 때문에요. <안성에서>
김종석 채널에이 부국장(전 동아일보 스포츠부장)
글= 김종석 기자(tennis@tenni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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