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의 창] 도저히 끊어낼 수 없는 이름

2024. 9. 12.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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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계절'은 권여선 작가의 일곱 번째 소설집이다.

수록된 단편 중 하나가 '실버들 천만사'다.

자신을 지키려고 고수한 선택들이 채운에게는 수천수만 가닥의 실을 엉키게 한 결과를 낳았다고 자책한다.

모녀 사이에 수천수만 가닥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밧줄로 꼬아 서로를 단단히 붙들어 매자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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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택이 상대엔 상처
관계는 필연적으로 상처 동반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때
진정한 관계 맺을 수 있어

'각각의 계절'은 권여선 작가의 일곱 번째 소설집이다. 수록된 단편 중 하나가 '실버들 천만사'다. 체육관 미화원인 반희가 노화 탓인지 무좀 탓인지 궁금해하며 우윳빛 발톱을 들여다볼 때 딸 채운의 전화를 받는다. 이혼한 전남편 병석이 재혼식을 못 올렸다는 통화에서 반희는 채운의 설득에 못 이겨 1박2일 여행을 약속한다.

8년 전 그대로 있다가는 죽을 것 같았던 반희는 집을 떠나왔다. 성인이었던 아들 명운보다는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인 딸 걱정이 컸지만 이혼을 선택했다.

작가 권여선은 반희가 이혼한 구체적인 사유를 언급하지 않는다. 독자가 과거의 이야기를 따라가지 않고 현재의 서사에 집중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반희의 이혼을 단순화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의도로도 짐작된다.

여행을 와서 딸의 트라우마를 처음으로 알게 된 반희는 충격에 빠진다. 두려워서 도망치고, 두려워서 숨고, 두려워서 밀어냈던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본다. 자신을 지키려고 고수한 선택들이 채운에게는 수천수만 가닥의 실을 엉키게 한 결과를 낳았다고 자책한다.

반희는 딸이 꾸는 악몽을 같이 꾸겠다고 결심한다. 모녀 사이에 수천수만 가닥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밧줄로 꼬아 서로를 단단히 붙들어 매자고 다짐한다. 딸의 아픔과 고통을 들여다보면서 반희는 자신의 방어기제를 내려놓는다. 결국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때 우리는 진정한 관계를 맺고 스스로를 옥죄던 족쇄에서 풀려난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목표가 상처를 받지 않는 거라면 그 목표는 영원히 달성할 수 없다. 관계는 상처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우리는 신이 아니기에 상대의 요구를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밀물과 썰물처럼 서로에게 다가가다 멀어지면서 상처에 새살이 돋고 관계가 회복된다.

반희는 과연 타인에게 상처를 준 적이 없었을까? 피해자이기만 했을까? 자신이 죽을 것 같다며 떠난 가정에서 채운은 숨 막힐 듯한 트라우마를 혼자서 견뎌야 했다. 반희는 고2였던 딸만 걱정했지만 성인인 명운과 병석은 엄마와 아내의 부재가 아무렇지 않았을까?

반희는 고2 딸이 걱정이라면서도 자기가 죽을 것 같아 가정을 떠났다. 딸에게 줄 상처보다 가정에 남아 자신이 견딜 고통이 더 크게 느껴졌다는 증거다. 반희는 자신의 상처는 확대하고 남이 받을 상처는 축소시켰다. 결과적으로 본인이 피하려던 폭력적이며 모욕적인 처신을 딸에게 대물림했다. 타인의 관심과 간섭에서 상처를 받지 않으려고 기존의 관계를 끊어왔다. 자신을 지키려고 친정과도 거리를 두며 살아가는 반희에게서 성장을 멈춘 '어른아이'가 얼핏 보인다. 반희는 1인 왕국을 건설하고 밖과 소통하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신념을 콘크리트처럼 공고히 해왔다. 혼자 있으면 안전함을 느끼고 다른 사람이 끼어 있으면 불편해지는 악순환을 반복했다. 그러던 반희가 채운이 홀로 견딘 고통의 시간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두려움으로 회피했던 반희가 채운의 상처에 직면하면서 반희의 멈추었던 성장이 재가동된다.

악몽도 같이 꾸고 마부작침의 의지로 실을 꼬아 밧줄을 만들겠다는 반희는 더 이상 물러나지 않고 도망가지도 않을 것이다. 힘듦을 끊어내지 않고 감수하려는 선택은 빛이 난다. 더 빛나는 것은 앞으로도 도망가지 않고 악몽 같은 현실에 눈감지 않는 것이다. '채운 씨'와의 이인삼각에서 더디 가더라도 '반희 씨'가 꼭 완주하기를 응원한다. 열린 마음으로 인생이란 길을 바라보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사건들이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맥박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 곁에는 도저히 끊어낼 수 없는 이름들이 함께하기에 인생의 어느 단계든 살아 있기만 하면 변화를 만들 기회는 남아 있다.

[김정랑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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