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시장은 탄광의 카나리아일까 [정삼기의 경영프리즘]
정삼기 씨에스케이파트너즈 대표 skchung@cskpartners.com
“경기 한파 닥친다며 생산·인력 줄이는 미국 제조업”
“AI 과잉투자론 확산에 월가, 인간 노동 대체하기엔 너무 비싸”
“9월 금리 인하 가능성에 엔비디아 13퍼센트 상승”
“세계 경제 변곡점, 이제 혼돈의 시간”
“강력한 침체 시그널에 연준 연내 금리 세 번 내릴 듯”,
“코스피 장중 2400선도 붕괴 낙폭 10퍼센트대로 확대”
“코스피 3100 갈 수도 성장주 비중 늘려야”
“인플레 가니 침체 걱정…유럽과 중국, 미국보다 앞서 피벗”
“탄탄한 미국 경제, 8월 고용지표 확인 뒤 금리 인하 폭 결정”
“식어가는 경기…올해 성장과 물가 전망 모두 낮춘 한은”
지난 7월 말부터 한 달 동안 이목을 끌었던 기사들입니다.
기사 제목만 보면 헷갈립니다. 과연 세계 경제, 특히 미국 경제가 정점을 찍고 식어가는 것인지, 주식시장은 궤멸의 초입으로 가는 건지 아닌지, 대외의존도가 극도로 높은 우리나라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 등등 도무지 가늠하기 힘듭니다. 그리고 금리가 인하되면 엔비디아가 뜨고 코스피는 3000을 넘긴다… 경제 전문가들과 언론은 하루가 멀다 하고 진단과 전망을 쏟아내는데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어지러웠습니다.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람들은 먼저 8월 5일의 주식시장 붕괴를 떠올릴 것입니다. 붕괴는 아시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일본과 한국, 대만 증시에 쓰나미가 덮쳤습니다. 일본은 1987년 이후 최악을 기록하였습니다. 유럽 증시도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아시아 투자자들은 저녁에 공포를 복기하면서 뉴욕 증시를 주시하였습니다. 소위 ‘공포지수’라는 변동성 지수(VIX 지수)는 2008년 금융위기 직후와 코로나 팬데믹 초기 수준으로 급등하였습니다. 세계 주식시장의 폭락이 본격적인 위기로 치닫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뉴욕 증시는 생각보다 차분했습니다. 날이 바뀌자 일본과 한국은 급반등하고 유럽도 되돌아왔습니다.
한 달 전의 증시 공포는 인공지능(AI), 엔화, 미국 경제 세 가지 때문이라 합니다. AI 특히 칩 제조업의 불안은 당시 백악관 재입성이 유력해 보이던 트럼프가 대만의 방위비 부담 선언으로 반도체 주가를 끌어내리면서 촉발되었습니다. 빅테크들의 부진한 실적도 작용하였습니다. 여기에 일본의 금리 인상이 거들었습니다. 금리 인상으로 엔화 가치가 오르자 저금리 엔화를 빌려 고수익 자산에 투자하던 흐름이 갑자기 역류하였습니다. 미국 경제 지표도 흔들렸습니다. 고용 지표가 기대에 못 미치며 경기 침체에 더 가까워졌다는 우려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AI 열풍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닙니다. 빅테크들의 AI와 데이터센터 투자는 어마어마 합니다. 알파벳,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메타 4개사는 올해 데이터센터 구축에 약 천억 달러, 우리 돈으로 130조원가량을 투자합니다. 관련 생태계 기업을 모두 합하면 2027년까지 데이터센터 투자는 1조4천억 달러나 됩니다. 그런 반면 빅테크들의 실적은 투자자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알파벳과 마이크로소프트의 상반기 실적 발표 후 나스닥이 하락하였습니다.
AI 공급망은 빅테크들에 그치지 않습니다. 대만 서버 제조업체와 스위스 엔지니어링 회사, 미국 전력업체 등 수백 개 기업들이 대규모 투자에 나서고 있습니다. 주연은 당연히 엔비디아입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그 뒤를 잇고 있습니다. 델과 휴렛패커드 같은 서버업체들도 무시못할 조연들입니다. 데이터센터에 전기들 공급하는 재생에너지 업계와 늘 고루해 보이기만 하던 송전 장비업체들도 분주합니다.
이런 기업들이 투자를 늘리면 박수를 쳐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불안합니다. AI 공급망 위험, 특히 과도한 엔비디아 의존 때문입니다. 엔비디아가 새로운 칩을 내놓으면 관련 생태계는 엔비디아에 운명을 걸고 올인합니다. 전력도 문제입니다. 2030년 미국에서 AI가 지금의 구글 검색 수준으로 활용된다면 전력 수요가 엄청나게 증가하지만 전력 확충은 요원합니다. 무엇보다 최대 위협은 수요 감소입니다. 생성형 AI의 잠재력은 큽니다만, 그 결실은 아직 미지수입니다. AI 수익 전망이 불투명해지면 빅테크들이 투자를 줄이며 공급망이 고스란히 타격을 입습니다.
엔 캐리는 예기치 않은 복병이었습니다. 캐리 트레이드는 금리가 낮은 통화에서 돈을 빌려 수익률이 높은 곳에 투자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본이 0퍼센트라는 초 저금리를 유지하고 다른 나라가 고금리를 유지하는 동안 엔화는 멕시코 페소에서 미국의 대형 기술주 등 고수익자산 투자에 쏠려 들어갔습니다. 문제는 금리 인상으로 엔화 가치가 오르면서 발생하였습니다. 엔 캐리 트레이드에 올라탔던 투자자들은 자산을 청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산 급매도로 손실이 나자 손실을 메우기 위해 다른 자산을 정리하는 소용돌이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엔 캐리 트레이드의 규모와 위험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진 게 없습니다. 달러-엔 캐리 트레이드가 정점에 약 5천억 달러에 달했으며 절반이 정리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심지어 무려 4조 달러나 된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불투명성 때문에 캐리 트레이드가 최근에 시장 변동성을 얼마나 자극했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지난번에는 일시적인 피해로 그쳤지만 다음 폭발이 언제 어떤 규모로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세계 경제의 원톱인 미국은 변함없는 상수입니다. 그런 미국의 경제 뉴스가 갈지자 걸음이었습니다. 주가가 폭락했다가 다시 반등하였고, 일자리 증가는 예상에 못 미쳤지만 이민 증가로 인한 일시적인 영향 때문이라며 안도했고, 소매 분야는 의외로 견고하였습니다. 시장에서는 고용지표 악화를 보고 비상사태 수준의 금리 인하 전망이 분출하다가 가라앉았습니다. 투자자들은 주요 기업들의 상반기 실적과 연준 의장의 발언을 예의주시하였습니다. 미국 경제가 확실히 둔화되고 있다는 것이 시장 컨센서스였습니다. 다행인 것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와 2020년 코로나 위기 등 최근의 두 충격 정도는 아니라 합니다.
유럽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금리를 인하하였습니다. 영국과 캐나다도 거의 확실시됩니다. 선진국들은 이제 인플레이션 목표에 근접하고 있고, 경제 성장률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거나, 기업 실적이 폭락하거나, 회사가 문을 닫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경제가 격변에 직면할 조짐은 거의 없고, 연착륙이 가능한 활주로가 시야에 들어왔다는 게 대세입니다.
주식시장은 이 모든 것을 받아낸다는 경제의 거울입니다. 그런데 혼란스럽습니다. 지난 8월 초에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손절매 결심을 하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 저가 매수 기회를 놓쳤다며 아쉬워합니다. 가자 지구 전쟁, 서방 세계와 중국 간의 무역 갈등, 트럼프 암살 시도 어느 것도 월스트리트의 훈풍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경기침체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졌고 인플레이션은 잡혔습니다. 미국과 유럽, 일본의 증시 모두 사상 최고치를 달렸습니다. 한 달 전 블랙 먼데이는 언제 있었냐 싶을 정도로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지난 9월 3일에는 뉴욕 증시가 크게 흔들렸습니다. 엔비디아는 대폭락하였습니다. 제조업 등 각종 지표가 시장 기대치를 밑돌며 경기침체 우려가 커졌다는 겁니다. 경제위기가 끝났다고 방심했다가 다시 ‘R(recession)의 공포’로 세계 증시가 떨고 있다는 겁니다. 한달 전만 하더라도 주요 선진국들이 호황을 거치면서도 인플레이션이 잡혀가고 경착륙은 없을 거라 했습니다. 전문가들은 또다시 한달 전과 별로 다를 게 없는 해석과 진단을 내놓았습니다. 이번 주 들어서는 미국 고용지표를 두고 비관론과 낙관론이 팽팽하고 당분간 금융시장은 ‘깜깜이 장세’를 이어갈 것이라 합니다. 미국 경제 지표만 바라보는 한국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최근 몇 년 동안 미국, 유럽, 일본과 같은 경기 호황은 없었고, 오히려 부동산 시장 과열을 우려하며 금리 인하마저 조심하는 분위기입니다.
이 때문에 주식시장이 정부와 기업과 개인 등 경제 주체들의 판단과 의사결정이 제대로 투영된 결과라는 데에는 시비가 걸릴 만도 합니다. 심리학자이자 행동경제학자인 대니얼 카너먼은 “생각에 관한 생각(Thinking, Fast and Slow)”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손실회피’ 성향을 언급합니다. 사람들은 가치나 효과 면에서 손실을 이익보다 훨씬 더 크게 여긴다는 겁니다. 위협을 기회보다 더 절박하다고 보는 이런 성향이 인류의 생존과 번식력을 높였다고는 하나 자본시장에는 그다지 듣기 좋은 얘기는 아닙니다. 뉴욕 증시를 주도하는 것은 빅테크들이고, 투자자들은 ‘갓비디아’에 몰리고, 엔비디아 시가 총액이 50조 달러까지 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엔비디아 주가가 꺾이자 공포의 소용돌이로 빠졌습니다. 이익에는 둔감하면서 손실에는 예민한 인간의 성급한 본성이 차분한 이성을 압도한 겁니다.
최근의 주식시장을 보면 경제적 요인 못지않게 투자자의 심리적 요인이 상당히 작용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정치적, 지정학적 리스크에는 둔감합니다. 정치적, 지정학적 리스크는 예측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해법 역시 대단히 복잡합니다. 최근까지 미국 경제는 호황을 구가했다 하나 코로나 팬데믹 때 살포된 돈의 약발이 상당하였음을 부인하기 힘듭니다. 미국의 재정적자는 해리스와 트럼프 둘 중 누가 대통령이 되든 확대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 되면 또다시 인플레이션이 고개를 들고 정부가 아닌 중앙은행이 해결사로 나설 겁니다. 하지만 당장 호주머니에 돈이 들어오는 개인들은 둔감합니다.
지정학적 리스크도 큽니다. 미국이 유럽과 중동에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수수방관하거나 중국과는 경제적으로 완전히 단절된 길로 가게 된다면 세계 경제는 대혼란이 뒤따를 것입니다.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아프리카 수단의 내전도 세계 경제를 흔들 수 있습니다. 지금 수십만 명이 학살당하고 전 국토가 파괴되고 있는 수단의 비극은 수에즈 운하의 봉쇄와 세계 물류 대란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식시장에 수단의 잠재적 위험이 투영되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습니다. 월스트리트와 빅테크들은 미국만 신경 쓰면 됩니다.
중국은 초대형 리스크가 될 수 있습니다. 중국은 경제 규모 못지 않게 정보의 불투명성으로 인하여 정책 결정과 자원 배분에 애로를 겪고 있습니다. 부동산 붕괴와 소비 침체는 잘 알려진 것이지만, 국제수지나 실업률, 외국인 투자 등 경제 지표에 대한 정보는 정부의 강력한 통제와 조정으로 신뢰하기 힘듭니다. 이 때문에 기업과 투자자들이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리기 힘들고, 다국적기업들은 짐을 싸고 있습니다. 자유로운 정보 흐름을 차단하고 통제하는 전체주의 정부가 경제에 암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역시 중국은 여전히 여러 모로 난해합니다.
이런 이유로 향후 경제는 안개 속입니다. 미국과 유럽은 인플레이션이 잡혔다며 이제 침체를 대비하여 금리를 내리고, 일본은 인플레이션을 잡는다며 금리를 올리고, 중국은 바닥을 기고 있지만 오리무중이고, 중동과 아프리카의 화염은 조용하면서도 위협적입니다. 그런 가운데 빅테크들은 쌓아둔 현금으로 지배력을 확대할 기회를 엿보고, 빅테크들에게 올인하고 있는 기업들은 조마조마한 나날을 보냅니다. 지나고 나면 전문가가 그럴싸한 해석을 내놓지만 미래에 대한 예측과 진단에는 역부족입니다. 주식시장을 보며 ‘탄광의 카나리아’처럼 경제와 기업의 위험에 대한 조기 경보 역할을 기대하기 힘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이사야 벌린의 “고슴도치와 여우(The Hedgehog and the Fox)”라는 책에서 두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고슴도치는 중요한 것 하나를 알고 세상을 봅니다. 특정 사건을 논리적으로 일관된 틀로 설명하고, 자기처럼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 자들을 도저히 참지 못하며 자기 예상을 확신합니다. 생각이 분명하고 의견을 굽히지 않습니다. 반면 여우는 중요한 것 하나가 역사의 행군을 이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는 여러 동력과 행위가 무수히 상호작용하고 때로는 예상치 못한 큰 결과가 나타난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고슴도치를 더 자주 불러냅니다. 중독적이면서도 무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예측불허의 세상에서는 여우의 눈이 더 필요할 겁니다.
영화 “가여운 것들(Poor Things)”에서 벨라 백스터는 천재 과학자의 피조물로 다시 태어납니다. 벨라는 과학자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하다가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새로운 경험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녀는 과학자의 보호에서 벗어나 유럽 대륙 여행을 하며 세상의 이치를 터득합니다. 벨라는 결국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벨라의 창조자이자 보호자였던 천재 과학자는 이런 벨라를 바라보며 평온하게 눈을 감습니다. 인류가 자신들의 경제 활동을 비추는 거울로 만든 주식시장이 이해하기 힘든 사건들로 인간의 심리를 흔들고 인간을 공포로 몰아넣는 게 아이러니입니다. 벨라는 달랐지만 말입니다.
(본 글은 The Economist의 ‘What could kill the $ 1trn artificial-intelligence boom?과 ‘The stockmarket rout may not be over’를 토대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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