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장으로 갈 때 내 팔이 아닌 꿈을 보았다”

김양희 기자 2024. 9. 12.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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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희의 인생 뭐야구]‘있는 것’에 방점 찍고 모두가 향유하는 운동장을 향하여
일본의 스즈키 다카유키가 2024년 9월3일(현지시각) 프랑스 라데팡스 아레나에서 열린 2024 파리패럴림픽 남자 자유형 200m 스포츠등급 S4 결승에서 역영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2024년 8월28일(현지시각) 시작한 2024 파리패럴림픽이 9월8일 폐막했다. 184개국 4400여 명이 참가해 22개 종목에서 549개의 금메달을 놓고 다퉜다. 프랑스 파리 현지 관중은 등수보다 장애인 선수들의 도전 그 자체를 응원해줬다. 가령 수영 종목은 1위보다도 가장 늦게 터치패드를 찍은 선수에게 더 많은 박수가 쏟아졌다. 사지 없이 몸통과 허릿심만으로 힘차게 역영하는 모습은 큰 울림을 주기에 충분했다. 현실 안주와 나태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듯도 했다.

오른손 없는 애벗은 야구를 택했다

패럴림픽에는 시각장애인 축구나 휠체어 농구, 좌식 배구, 골볼 등의 구기 종목이 있지만 야구는 없다. 하지만 장애인 선수가 올림픽 야구 경기에 출전했던 사례는 있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 그랬다. 당시 야구는 정식종목이 아닌 시범종목이었는데 짐 애벗은 미국 대표팀으로 출전해 금메달을 땄다. 일본과의 결승전에 선발 등판한 애벗은 9이닝 7피안타 3실점으로 완투하면서 미국의 5-3 승리를 이끌었다.

애벗은 선천적으로 오른손 없이 태어났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스포츠를 좋아했다. 그의 부모는 손 사용이 없는 축구를 시키려 했으나 그는 축구를 싫어했다. 다른 동네 아이들처럼 치고, 달리고, 던지는 야구를 택했다. 그는 한 손으로 야구를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몇 시간 동안 벽돌 벽에 고무공을 던지고 받으면서 반사신경을 키웠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공을 던진 뒤 재빨리 글러브를 끼고 공을 다시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수년 동안 이와 같은 훈련을 반복했고, 벽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면서 더 빨리 글러브 전환을 가능하게 했다.

미국 프로야구 애너하임 에인절스(현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투수인 짐 애벗이 1996년 7월3일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경기에서 장애가 있는 오른손에 글러브를 걸친 채 역투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물론 상대 팀은 집요하게 애벗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고교 시절에는 첫 8타자가 연속해서 번트를 댄 적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단 1명만 1루로 살아나갔고 7명은 전부 아웃됐다. 애벗은 1985년 메이저리그 신인 드래프트에서 토론토 블루제이스로부터 36라운드 지명을 받았다. 그의 고교 성적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지명 순위였다. 그는 결국 계약을 거부하고 미시간주립대학으로 진학했다. 그는 후에 이런 결정을 내린 데 대해 “스카우트가 내가 장애를 가졌다는 점에만 흥미를 보여 불쾌했다”고 밝혔다.

애벗은 1987년 미국 최고 아마추어 선수에게 수여하는 제임스 E. 설리번상을 받았는데, 야구선수로는 최초의 수상이었다. 그의 등번호 31번은 미시간주립대학 영구 결번으로 지정됐다. 장애는 더 이상 그의 걸림돌이 아니었다. 그는 1988년 메이저리그 1라운드 전체 8순위로 애너하임 에인절스(현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의 지명을 받고 곧바로 빅리그에 입성했다. 역사상 15번째로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은 메이저리거가 됐다. 애벗은 “모든 희망이 없어질 때까지 불가능한 일은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장애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관문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빅리그 데뷔 첫해 12승 12패 평균자책점 3.92의 준수한 성적을 올렸고, 1990년 200이닝, 1991년 243이닝을 던졌다. 1991년에는 사이영상 3위에 올랐다. 1992년에는 211이닝을 소화했는데 평균자책점이 2.77에 불과했다. 하지만 승은 겨우 7승(15패)을 따냈는데 에인절스 타선이 얼마나 빈약했는지 알 수 있다.

애벗은 1993년 뉴욕 양키스로 이적해 노히트 노런(단 1개의 안타도, 점수도 내주지 않는 것)을 기록하기도 했다. 양키스 투수 역대 7번째 대기록이었다. 그는 1999년 밀워키 브루어스에서 은퇴할 때까지 10시즌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뛰면서 263경기 1674이닝 투구, 83승 108패 평균자책점 4.25를 기록했다. 다만 두 손을 쓸 수가 없어서 도루 허용이 많았다. 그는 원정 경기를 치를 때마다 꼭 한 번은 장애 어린이들을 만났다고 한다.

장애인으로 메이저리거가 된 이들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던 장애 선수는 애벗 외에도 여럿 있었다. ‘세 손가락 브라운’(스리 핑거 브라운)으로 불린 모데카이 브라운도 그들 중 한 명이다. 그는 어린 시절 농장 기계 사고로 오른손 손가락 두 개의 일부를 잃었다. 그래도 그는 세 손가락으로 다양하게 그립을 잡고 공을 던졌다. 홈플레이트 앞에서 뚝 떨어지는 변화구(커브)가 일품이었다. 1904년부터 1912년까지 시카고 컵스에서 뛴 그는 20승 이상을 6차례나 했고, 두 차례 월드시리즈에 출전했다. 그의 통산 성적은 239승 130패 평균자책점 2.06.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도 올라 있다.

피트 그레이는 6살 때 농장 마차를 타다가 미끄러져서 오른팔의 3분의 2를 절단했다. 베이브 루스를 동경하던 그는 오른손잡이였으나 이후 왼손으로 타격과 수비하는 방법을 익혔고, 1945년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와 계약하면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출전 선수가 부족한 상황에서 얻은 꿈의 기회였다. 그는 77경기에 중견수로 출전해 타율 0.218, 수비율 0.958을 기록했다. 그의 모습은 전쟁 과정에서 장애를 입고 고향으로 돌아온 군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줬다.

단점을 보느냐, 장점을 보느냐 

이 밖에도 윌리엄 호이와 커티스 존 프라이드는 청각장애인으로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다. 프라이드의 경우 은퇴 뒤 ‘투게더 위드 프라이드’(Together With Pride) 재단과 함께 청각 장애 아동을 위한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만드는 데 앞장섰다. 채드 벤츠는 애벗과 마찬가지로 오른손 없이 태어났는데 2004년 메이저리그 데뷔를 일궈냈다. 그의 멘토는 애벗이었다고 한다. 애벗을 바라보면서 꿈을 키웠고, 기어이 빅리그 무대를 밟았다. 꿈은 꿈으로 연결된다.

“나는 야구장으로 갈 때 팔이 아닌 꿈을 보았다”라고 말한 애벗은 이런 말도 남겼다. “인생의 상황이 변명이 되도록 절대 허용하지 말라. 사람들이 당신이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가진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 빼앗긴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헬로키티는 입이 없고, 도라에몽은 귀가 없다.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올라프는 손가락이 4개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의 결핍을 얘기하지 않는다. 애벗의 말처럼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에 방점을 찍고 그들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나 혹은 남에 대한 평가에서 단점을 먼저 보느냐, 장점을 먼저 보느냐의 차이가 한계의 수준을 가를 것이다.

애벗의 말로 글을 마무리한다. “나의 목표는 내가 될 수 있는 최고의 야구 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게 내가 기억되기를 바라는 방식이었다. 끊임없이 특정 범주에 속하는 것이 절망스러울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분류와 기대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생각을 실천하게 된 나 자신이 매우 자랑스럽다.”

김양희 한겨레 문화부 스포츠팀장 whizzer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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