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안익태에 첼로 가르친 선교사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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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말엽과 일제강점기 때 한국에 온 외국인 선교사가 3100여 명에 달합니다. 그중 우리가 이름을 익히 알아서 기리는 분들은 신학, 교육 분야에서 활동하신 10여 명 정도입니다. 그 밖에도 공업기술, 체육, 의료, 사회사업 영역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준 분들이 참 많습니다. 한국 근대화의 바탕이 됐지요. 이제 우리도 먹고살 만 하게 됐으니 그분들의 은혜를 고맙게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레그 선교사 같은 분들이 한국의 공업관을 다져놨기 때문에 우리가 근대화를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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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에 기술전수한 그레그
유관순 시신 인수했던 월터
축구 도입 반하트도 잘몰라
잊힌 분들 이제라도 기려야”
“조선조 말엽과 일제강점기 때 한국에 온 외국인 선교사가 3100여 명에 달합니다. 그중 우리가 이름을 익히 알아서 기리는 분들은 신학, 교육 분야에서 활동하신 10여 명 정도입니다. 그 밖에도 공업기술, 체육, 의료, 사회사업 영역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준 분들이 참 많습니다. 한국 근대화의 바탕이 됐지요. 이제 우리도 먹고살 만 하게 됐으니 그분들의 은혜를 고맙게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기 작가 임연철(76) 씨는 최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도 먹고살 만 하게 됐으니…”라는 말을 수차례 했다. 구한말·일제강점기 우리 한국인에게 서구 문물을 전해 준 선교사들을 발굴해 소개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동안 신학자와 역사학자들에 의해 부각된 분들 말고 상대적으로 음지에 있는 분들을 세상에 알리고자 한다”고 했다.
임 씨는 유관순 열사가 순국하자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가 시신을 인수한 지네트 월터(1885∼1977), 한국에 스포츠 축구·야구·배구·농구를 도입한 바이런 반하트(1889∼1942) 선교사에 대한 책을 펴냈다. 또 우유 급식 사업으로 어린이 건강 향상에 기여한 마렌 보딩(?∼1957), 농업 교육에 헌신한 프랭크 윌리엄스(1883∼1962) 부자, 충청 지역에서 교육 활동을 펼친 로버트 샤프(1872∼1906) 선교사를 다룬 책도 잇달아 출간했다. 6·25전쟁 때 포로가 됐다가 3년 만에 풀려난 래리 젤러스(1922∼2007) 선교사의 책 ‘적의 손아귀에서’를 번역해 펴내기도 했다.
그는 이번에 7번째 선교사 책으로 ‘한국기계 기술의 개척자 그레그’(밀알북스)를 출간했다. 1906년 YMCA 산업학관 설립자 겸 공업 선교사로 한국에 온 조지 아서 그레그(1863∼1939) 선교사를 조명했다.
“캐나다 출생인 그레그는 토론토와 미국 디트로이트 기계 공장에서 기계 기술을 배웠습니다. 뉴욕에서 제도전문가로 일하며 YMCA 활동도 했습니다.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CA 전신)가 뉴욕 본부에 기술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을 보내달라고 해서 당시 독신이었던 그레그가 공업선교사로 오게 된 것이지요.”
1906년 43세 때 한국에 온 그레그는 21년 동안 철공, 목공 등 다양한 분야의 기술을 조선 청년들에게 전수했다. 1927년 중풍이 심해져 귀국할 때까지 한국에 머물며 배출한 제자는 3000여 명에 달한다. “구례구(具禮九)라는 한국명을 사용했던 그레그는 조선이 공업을 통해 가난을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청년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업입국 가치관과 비슷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이 그레그 선교사를 알았더라면 금탑산업훈장을 줬을 거예요(웃음).”
그레그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사진 기술도 전수했으며, 프로급 첼리스트로서 나중에 애국가를 작곡하는 안익태에게 첼로를 가르치기도 했다. 모우리 평양숭실중 교육선교사가 제자인 안익태의 개인교습을 그레그에게 부탁해 교습이 이뤄졌다고 한다.
“그레그 선교사 같은 분들이 한국의 공업관을 다져놨기 때문에 우리가 근대화를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겁니다.”
임 씨는 언론인을 거쳐서 국립중앙극장장 등 예술경영인으로 활동했다. 근년에 전기 작가 활동에 주력하는 그는 한국 현대 문화의 저변을 이룬 선교사들을 소개하는 작업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현지 취재를 다니다 보면 선교사 후손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분들을 한국에 초청해 감사를 표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이제 살 만하니까.”
장재선 전임기자 jeije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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