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 이 여행] 고래와 만나는 땅, 울산 남구
(시사저널=글 남혜림·사진 신규철)
아득한 과거부터 현재까지, 여전히 고래와 함께 살아가는 울산 남구 장생포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부' 하는 뱃고동 소리가 울리는 항구를 바라본 채 섰다. 장생포항을 오가는 선박은 다양하다. 자재를 나르는 작은 배부터 먼바다로 나가려는 큰 것까지 물살을 가르며 하얀 물보라를 일으킨다.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여름 끝자락, KTX를 타고 울산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울산 남구의 장생포. 고래와 사람, 바다가 줄곧 교감해 온 공간이다.
고래와 이어진 삶, 장생포 고래문화마을
조선 시대, 선조들은 동해를 경해라고도 불렀다. 한자 경(鯨)은 고래를 의미한다. 고래 바다라 이름 붙였다는 것은 바다에서 고래를 보는 일이 흔했다는 뜻. 울산, 특히 장생포 사람들은 그보다 아득한 옛날에도 고래와 삶을 공유해 왔다. 신석기시대 유물로 추정하는 반구대 암각화에 고래 그림이 존재하니, 동해를 경해라 기록하던 때보다 몇 곱절은 과거인 시점부터 함께 살아왔다고 할 수 있겠다.
19세기 후반, 포경업이 성행하던 시기에 유럽 등 타국에서 온 포경선이 조선 바다 근처에서 고래잡이를 시작한다. 당시 조선은 포경선, 포경포 관련 기술이 없었기에 직접 바다로 나서기 어려워 바라보아야만 하는 처지였다. 러시아의 태평양포경회사가 장생포에 고래해체장을 설치한 1899년, 포경 기술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들어온다. 그러나 5년이 지나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러시아가 패배한 후 일본이 포경업을 독점한다. 장생포 주민들은 광복을 맞고 나서야 포경 산업의 주도권을 쥔다. 1986년 상업적 포경이 전면 금지되기 전까지만 해도 장생포에서 고래잡이는 일상이자 삶 자체였다.
겹겹이 쌓인 시간의 일부를 들여다보려 장생포 고래문화마을로 걸음을 옮긴다. 10만 2705제곱미터(약 3만 1068평) 규모로 고래조각정원, 고래광장, 장생포옛마을 등을 조성해 2015년 문을 열었다. 마을 동편 입구에 들어서자 레트로 감성이 물씬 풍기는 입간판과 색 바랜 기와집이 보인다. 1960~1970년대, 포경 산업이 호황이던 장생포의 모습을 재현한 장생포옛마을이다. 서점, 양과자점, 다방, 전당포가 늘어선 골목이 정겹다. 지폐를 문 개 동상이 길모퉁이에서 시선을 끈다. '지나가는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라는 풍문이 돌 정도로 부흥했던 장생포를 표현한 것이라니 설핏 웃음이 나온다. 포수와 선장이 쓰던 물건, 작업복, 제복 등을 전시하고 장생포에서 활약했던 포수, 선장의 사진을 걸어 놓은 주택도 살핀다. 역대 포수의 사진을 보며 그들이 배 위에서 바다를 누비는 모습을 상상한다. 운이 좋다면 실제 포수였던 해설사와 만날 수 있다. 과거 장생포를 이끌었던 주역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귀중한 시간이겠다.
장생포초등학교, 고래해체장, 고래막집 등을 둘러보고 마을에서 빠져나온다. 장생포 모노레일이 머리 위를 지나가자 시간 여행을 마치고 현재로 돌아온 느낌이 든다. 걸음을 재촉해 언덕을 올라가다 실물 크기의 고래 조각을 전시한 고래조각공원에서 속도가 느려진다. 향유고래, 범고래, 혹등고래…. 여러 고래가 눈길을 끌지만, 장생포 하면 역시 귀신고래다. 울산 앞바다는 귀신고래가 새끼를 낳기 위해 이동하는 경로였다. 암초 사이에서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해 붙은 이름인데, 귀신이라는 섬뜩한 표현과는 달리 바다 밑바닥에 사는 저서 갑각류를 먹이로 삼는다.
"귀신고래는 몸을 눕혀 해저를 휘저으면서 침전물을 입으로 빨아들여 먹이를 먹는다고 해요. 이때 몸에 따개비가 붙어 자라는 겁니다. 보세요, 조각에도 따개비가 있네요." 최승희 문화관광해설사가 귀신고래 조형물 앞에서 설명을 붙인다. 이동하는 동안 길가나 도로에서 지나쳤던 고래 조형물 표면이 오돌토돌했던 이유다. 장생포 사람들에게 고래는 이웃 주민, 혹은 벗만큼 가까운 존재일 테니 작은 조형물에 이런 세심함과 애정을 쏟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고래를 향한 울산 남구의 진심은 마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미디어아트 전시관 웨일즈판타지움에서도 느껴진다. 울산 바다, 반구대 암각화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미디어아트를 감상한 뒤 전시관의 하이라이트 를 상영하는 구간으로 들어간다. 둥글게 휜 벽면 전체에 태화강, 장생포항이 나타나고 환상의 고래가 그곳을 유영한다. 관람자와 교감하듯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 때는 탄성이 나온다. 영상 속 고래의 잔상이 남아 쉬이 자리를 뜨지 못한다. 유연한 지느러미의 움직임과 모든 일을 안다는 듯 그윽한 눈. 고래 울음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듯했다.
장생포와 고래, 그리고 예술
"새끼 고래 수백 마리 펄쩍 뛰고 춤추면/ 다칠까 돌고래 휩싸서 들이고/ 파도는 해안 따라 삥 둘러 에워싸고". '장생포 타령'은 시인 노영수가 자신이 나고 자란 장생포를 그린 시다. 분주하고 활기찬 항구의 모습, 바닷사람들의 일상, 고래의 존재까지 더해지니 영감이 차오르지 않을 수 없다. 문화 자원이 풍부한 장생포의 특징을 활용해 생겨난 곳이 있다. 울산 남구 문화예술창작촌은 장생포 아트스테이, 창작스튜디오 131, 새미골 문화마당 총 세 군데 거점을 마련하고 예술가의 창작 활동을 돕는다.
문학 분야 예술 레지던시 장생포 아트스테이부터 살피기로 한다. 크고 작은 배가 정박한 장생포항을 따라가다 골목으로 파고들자 넓은 마당을 가진 건물 하나가 보인다. 페인트를 덧칠한 외벽, 건물 구조 등이 세월의 흔적을 품었다. 이곳은 본래 1970년대 뱃사람들이 주로 머무르던 신진여인숙 건물이었다. 단칸방과 2층 구조 등 아늑한 여관 원형을 고스란히 살려 2018년 문학 레지던시이자 장생포 주민이 오가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옥상은 분위기가 달라진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장생포항이 선명하다. 굴뚝에서 뭉게구름 같은 연기를 뿜어내는 공업단지를 관찰하다 커다란 구조물에 새긴 고래 그림을 발견한다. 깊은 바닷속으로 숨어 버린 고래를 그리워하고 기억하는 방식인 걸까. 이제는 바다에 나가도 예전만큼 마주하기 어렵다. 고래들이 노닐던 공간에 배와 사람, 건축물이 들어섰으니 당연한 결과다. 감정이 오묘해지는 찰나였다.
"장생포는 일반적인 포구와는 문화가 조금 다릅니다. 고래잡이 때문이지요. 상업적 포경이 금지되고 대규모 공업단지가 들어선 후 고래를 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면서 장생포 주민의 삶도 잠시 나아갈 길을 잃었어요. 기술 발전이 나쁜 일은 아니지만 그에 따른 결과는 받아들여 더 나은 길로 나아가야겠죠. 이제는 고래 문화를 가닥으로 잡아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울산문화예술창작촌 한승태 팀장이 창작스튜디오 131로 길을 안내한다. 유휴 공간이던 장생포 동사무소는 옛 신진여인숙처럼 리모델링을 거쳐 현재 시각예술 레지던시로 거듭났다. 내부 작은 전시실에는 회화, 탁본 등 각기 다른 방법으로 장생포를 표현한 작품이 걸렸다.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함께 장생포에 고래가 어떤 의미인지 계속해서 탐구하고 찾아보려 해요." 한승태 팀장이 말을 덧붙인다. 최근 울산문화예술창작촌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9월에 열리는 울산고래축제 준비다. 장생포초등학교 학생들이 예술가와 협업해 그린 그림을 증강현실·AI 기술을 활용하여 장생옛길 등에서 마주하도록 할 예정이라니, 그들이 바라본 장생포와 고래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분명 그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한 새로운 형태일 테다.
바다의 수호자, 울산함
다시 발걸음을 고래문화마을 쪽으로 돌린다. 고래와 그 문화를 지키려는 장생포 사람들처럼 누군가를 수호하는 데 일생을 보낸 울산함에 가기 위해서다. 고래박물관과 고래생태체험관 뒤쪽, 거대한 배 한 척이 우뚝하다. 높이 약 28미터, 길이 102미터를 자랑하는 배에 압도된다. 선미에 달린 닻이 사람만 하니, 다른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그 웅장함을 가늠하겠다. 한국 최초의 호위함 울산함은 1980년 출정한 이후 2014년 12월 퇴역할 때까지 해양을 누비며 34년간 대한민국 영해를 수호했다. 설계와 건조 등 선박 제작에 필요한 모든 것을 오로지 한국 기술로 이뤄 내 의미가 깊다.
지하 1층 하갑판으로 입장해 조타실이 위치한 4층 최상갑판까지 자유롭게 관람한다. 해군 병사들이 머물며 실제 임무를 수행했던 공간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다가온다. 여행자가 오랜 시간 머무는 곳은 4층 최상갑판, 배의 심장과 같은 조타실일 것이다. 함장을 비롯한 주요 인원이 함선을 지휘하는 장소인 만큼 각종 기계장치, 레이더 등이 고스란하다. 내부 장치에 익숙해질 즈음 창밖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정면의 울산석유화학단지, 측면의 조선소에서 작업이 한창이다. 마침 출항하는 고래바다여행선을 목격한다. 울산함 부함장 좌석에 앉아 장생포항과 여행선을 한눈에 조망하는 경험을 놓치지 않고 음미한다. 문득 포경선이 드나들던 50년 전 장생포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친다. 넓은 공업단지에서 열기가 아른거리고, 고래를 찾으러 떠나는 여행선이 오가는 현재의 장생포항. 다시 50년이 흐른다면 어떤 광경이 펼쳐질지 막연히 상상하는 순간이었다.
변함없이 빛날 장생포에서
어느새 하늘이 노란빛으로 물든다. 선암호수공원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했다. 호수에 놓은 덱 길을 산책하는 사람과 유유히 헤엄치는 오리가 교차하는 모습이 평화롭다. 물 밖으로 머리를 빼고 입을 뻐끔거리는 거북을 지나 우거진 나무가 만든 그늘 속을 걷는다. 계절의 경계라 그런지 매미와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동시에 들린다. 이를 배경음악 삼아 남구 순환 산책로인 솔마루길에 오른다. 15분쯤 지나자 신선산 정상 부근의 신선정에 다다른다. 해는 금세 모습을 감추어 사위가 어둑하지만, 도시가 발하는 빛으로 주변이 환하다. 시내 반대편은 공업단지의 불빛이 일렁인다. 이따금 저 멀리서 '캉' 하고 금속 부딪치는 소리도 들려온다.
울산 남구의 밤은 이토록 낮만큼 활기차고, 삶의 열기로 뜨겁다. 50년 후의 장생포 모습도 이러하겠다. 시간이 흘러 모습이 바뀔지언정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장생포 사람들은 부단히 바다와 교류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 삶에 고래가 함께한다는 사실도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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