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콕 연휴, 뭘 읽어도 ‘시간 순삭’
샹젤리제 역사 조명 ‘파리의 발명’
헤밍웨이·피카소 삶 그린 ‘증오의 시대’
카프카 미완성 유작 실은 ‘디에센셜’
서점가에는 유독 진입장벽이 있는 길고 짧은 책들이 있다. 500쪽이 넘는 분량 때문에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을 것 같은 ‘벽돌책’과 200페이지도 되지 않지만 유독 접근하기 어려운 장르로 여겨지는 ‘시집’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번 추석 연휴는 이런 책들에 생긴 편견을 깰 좋은 기회다. 지금 서점가에는 ‘막장 드라마’보다 자극적인 사랑 이야기로 술술 읽히는 벽돌책과 다가올 가을날을 기대하는 내 마음과 닮아 있는 시집들이 있다. 문화일보 북리뷰팀이 독자들의 편견을 깰 만한 벽돌책과 시집을 각 6권씩 골라봤다.
◇파리의 발명 = 일 년에 두 번뿐인 명절, 당장에라도 해외로 나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은 단 5일. 유럽으로 떠나기엔 어딘가 아쉽고 장거리 여행을 다녀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다. 에리크 아장의 ‘파리의 발명’은 그런 우리를 책을 펼치는 순간 낭만의 도시 한가운데로 안내한다. 파리의 역사를 600쪽에 걸쳐 정리한 책은 상점이 늘어선 샹젤리제와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몽마르트르, 마레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예술인의 도시로서의 모습과 동시에 혁명과 투쟁의 역사를 안고 있는 과거를 보여준다. 책에 수록된 18세기 파리의 사진들은 지금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도 볼 수 없는 정경이다. 글항아리. 656쪽, 5만 원.
◇내 이름은 데몬 코퍼헤드 = 오마주와 변주는 영화나 음악뿐만 아니라 책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올해 다양한 소설이 고전을 오마주해 출간됐지만 그중 ‘내 이름은 데몬 코퍼헤드’는 유독 눈에 띄는 작품이다. 알코올과 마약에 중독된 10대 미혼모에게서 태어난 소년 데몬의 이야기는 175년 전 영국 대문호 찰스 디킨스가 쓴 자전적 소설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차별과 가난에 대해 풀어낸다. 지난해 퓰리처상을 받은 작품인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와 함께 세계적인 상을 받은 책을 읽었다는 만족감은 덤이다. 은행나무. 848쪽, 2만5000원.
◇증오의 시대, 광기의 사랑 = 헤밍웨이와 파블로 피카소, 아인슈타인과 요제프 괴벨스가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사실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이 책은 1929∼1939년까지 10년간 이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교차해서 풀어낸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바로 ‘사랑’.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열렬한 사랑부터 스콧 피츠제럴드와 아내 젤다의 권태로운 사랑, 이기적이거나 광기에 어리기도 한 이 시대 인물들의 사랑 이야기가 영화보다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문학동네. 584쪽, 3만 원.
◇영화, 소리의 예술 = 130년 가까이 되는 영화사를 이해하기 위해선 때로는 수백 편의 영화를 보는 것보다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이 효과적일 때가 있다. 그중에서도 영화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소리와 음악, 바로 그 역사를 정리한 책이 ‘영화, 소리의 예술’이다. 1927년, 소리의 도입은 영화의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든 사건이었다. 영화제작 방식부터 영화관까지 영화 산업을 재정립했고 무성 영화에 익숙했던 관객들이 영화를 수용하는 양상까지 크게 바꿔놓았다. 작곡가이자 영화 이론가인 저자는 749편에 달하는 영화를 바탕으로 영화사를 소리의 관점에서 풀어낸다. 문학과지성사. 875쪽, 4만4000원.
◇디 에센셜:프란츠 카프카 = 프란츠 카프카의 사후 100주기를 맞은 올해, 서점가에서 출간되는 수많은 카프카 관련 저서는 우리가 이 세계적인 체코 작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깨닫게 한다. 무수히 많은 책 가운데 단 한 권으로 카프카의 세계를 이해하고 싶다면 단연 ‘디 에센셜: 프란츠 카프카’다. 카프카가 남김없이 불태워 달라고 부탁했지만 결국 세상에 나온 미완성 유작 ‘실종자’부터 ‘시골길의 아이들’ ‘사기꾼의 가면 벗기기’ ‘결심’과 같은 단편들,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까지 한 권에 담아냈다. 민음사. 767쪽, 1만9000원.
◇루이스 칸 : 벽돌에 말을 걸다 = 콘크리트와 태양 빛으로 건축사에 한 획을 그은 위대한 건축가의 인생을 한 권의 책으로 알아본다면 어떨까. 책은 건축가 루이스 칸의 타계 50주년을 맞아 방대한 양의 인터뷰, 서간, 일기와 메모 등을 바탕으로 그의 삶과 업적을 집대성했다. 단순히 연대기별로 정리했다면 지루할 수 있는 것이 평전이다. 다만 책은 그의 삶과 건축처럼 독특한 형식으로 정리됐다. 바로 죽음에서 시작해 출생으로 끝을 맺는 역순의 전개방식을 택한 것. 사물의 기원, 존재의 본질로 돌아가고자 했던 루이스 칸의 신념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사람의집. 656쪽, 3만 원.
짧아도 울림있는 시집 6권
기도하는 마음 ‘당신의 그림자…’
날것의 언어 ‘배가 산으로…’
우주같은 상상력 펼친 ‘미래의 손’
◇당신의 그림자 안에서 빛나게 하소서 = 한가위 하면 보름달. 둥글게 가득 찬 보름달을 보면 자연스레 마음속 깊이 오랜 시간 묻어뒀던 소원을 빌고 싶어진다. 모든 침묵을 지키고 있던 시간 동안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히, 그러나 끝없이 기도하는 시인 이문재. 시인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적어 내려간 시만 골라 한 권에 묶었다. 시집을 가까이하고 싶었으나 그동안 어렵게 느껴졌던 독자라면 한결 문턱을 낮춘 시선집을 추천한다. 달. 176쪽, 1만4000원.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기도하는 것이다.’(‘오래된 기도’ 중에서)
◇나와 오기 = 여름과 겨울 사이, 더위와 추위 사이. 가을을 맞이하는 9월을 오롯이 담아낸 유희경 시인의 시·에세이집. 지금껏 지내온 가을날을 추억하고 다가올 가을날을 기대하며 시인은 9월 1일부터 30일까지 각 한 편의 글을 알차게 담았다. 매일 한 편씩 읽어도 좋지만 시인이 건네는 편안함 덕에 어느새 페이지는 날짜를 훌쩍 앞질러 갈 것이다. 난다. 256쪽, 1만5000원.
◇배가 산으로 간다 = 10년 전 가을에 태어난 시집. 시인은 조용한 언어로 달과 가을, 겨울을 노래하지만 직접적인 시어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마치 쓸쓸하게 중얼거리며 읽는 편지와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정제되지 않은 시어와 때아닌 유머는 시집을 더욱 특별한 분위기로 채운다. 아직 누군가 주목하지 않은 시집들을 마음에 저장해 ‘목록’을 작성하고 있는 독자라면, 민구 시인의 첫 시집을 건넨다. 문학동네. 112쪽, 1만 원.
◇우연한 미래에 우리가 있어서 = 바쁘게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연휴를 맞으며 기대하는 것은 다시 한 번 힘을 내 살 수 있는 원동력, 진정한 휴식이 아닐까. 때로 진정한 쉼이란 오롯이 혼자 있는 시간에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시란 결국 혼자서 쓰게 되는 것이고 지나간 사람들과 나눴던 기억을 무한히 흘려보낸 후에야 홀로된 마음으로 적을 수 있는 것을 신용목 시인은 증명한다. 문학과지성사. 192쪽, 1만2000원.
◇이 시는 누워 있고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 어느새 연휴도 지나가고 시집의 마지막 장도 덮어버렸다. 그런데 자꾸 생각나 다시 펼치게 된다. 대단해지고 싶었지만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것조차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너무 당연해서 어느새 잊고 있었던 사실을 임지은 시인은 가만히 꺼내 놓는다. 민음사. 184쪽, 1만2000원.
‘돌을 기르기로 했어 동그랗고 매끄러운, 한 손에 쏙―들어가는, 한 개의 돌을 사랑하기로 했어 돌을 사랑하게 되자 주머니가 필요했어 필요는 사랑의 충분조건, 주머니도 사랑하게 되었어/주머니는 외투에 달려 있고 외투를 사랑하게 되면 외투를 입을 수 있는 날씨를 사랑하게 되고 날씨를 사랑하게 되면 내일을 기다리게 되는 연쇄 작용’(‘반려돌’ 중에서)
◇미래의 손 = 올해 나온 것 중 놓쳐선 안 될 시집을 단 한 권만 꼽아야 한다면 주저 없이 꺼내 들고 싶은 책. 2020년 등단한 차도하 시인의 첫 시집이자 2023년 10월 22일 만 스물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시인의 유고시집. 살아있는 모든 순간에 온 힘을 다해 우주 가장 먼 곳으로 펼쳤던 상상을 담은 시 62편이 묶였다. 시가 시인이 세상에 뻗은 손이라면 시를 읽음으로 시인의 손을 맞잡을 수 있을 것이다. 봄날의책. 160쪽, 1만3000원.
‘어떤 사람의 죽음이/오늘의 교통 상황에 숫자로 기록되는 동안/두 사람은 갑자기 자신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어떤 영혼이 떠나가는 것을 느낀다./…//이제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각자의 방식으로 애도를 마무리하고/남은 삶을 살아갈 것이다.’(‘기억하지 않을 만한 지나침’ 중에서)
신재우·장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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