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 앞에 꼭 ○○○이 있어야 한다
양창모 | 강원도의 왕진의사
그때의 열은 올여름의 열대야를 닮아 있었다. 끝날 거라 생각했는데 끝나지 않았다. 감기 증상이라 생각했던 열은 4일째가 되어도 떨어지지 않았다. 5일째는 더 심해져 고열과 오한으로 이불을 뒤집어쓴 채 밤을 새워야 했다. ‘감기라면 3일 이상 열이 지속될 수 없는데…. 응급실에라도 갈까?’ 내 의학지식이 오히려 불안을 부추겼다. 이불 속에서 오들오들 떨며 한밤중에 청진기를 꺼내 가슴에 대고 호흡음을 들어보기도 했다. 다행히 숨소리는 정상이었다. 다음날 아침 득달같이 병원에 가 흉부사진을 찍었다. 깨끗했다. 안심이 됐다. 그리고 하루 만에 열은 거짓말처럼 떨어졌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경험을 최근 다시 떠올리게 만든 건 보건복지부의 발표였다. “경증환자가 응급실을 찾는 경우 본인부담금을 90%까지 인상하겠다”는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환자가 자신이 경증인지 중증인지 어떻게 알아? 의사인 나도 모를 수 있는데?’ 진료실에 있다 보면 증상은 중증이지만 최종 진단은 경증으로 나오기도 하고 반대로 증상은 경증이지만 검사 결과 중증으로 나오는 경우도 허다하다. 의사도 진단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날 밤 나도 마음속으로 수십번도 넘게 응급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무너진 응급의료에 대한 최종 책임은 정부에 있다. 복지부의 발표는 그 책임을 환자인 국민에게 지우는 것이다. 책임이 없는 환자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특히 노인의 경우, 실제에 비해 위험도를 낮게 평가할 가능성이 높아 응급의학과 의료진조차도 주의해야 한다(이동훈, 2023). 하물며 의료진도 아닌 노인 환자 본인은 어떨 것인가. 방문진료 가서 만난 박 할아버지가 그런 경우였다. “멀쩡한데 왜 응급실에 가냐”며 고집을 피웠다.
할아버지는 섭씨 45도가 넘는 비닐하우스에서 하루 종일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일을 했다. 혈당을 재봤다. 너무 높아 측정 불가였다. 잘못되면 ‘고혈당 혼수’가 올 수 있는 상황. 급히 대학병원 응급실로 전화했다. ‘입원은 어렵다. 대기 상태로 응급실 복도에서 며칠을 치료받다 갈 수도 있다’고 한다. 할아버지와 상의 끝에 입원하지 않고 치료해보기로 했다. 비용 걱정도 한몫했다. 급히 생리식염수를 주사하고, 인슐린 주사를 처방하고, 혈당 측정법을 교육하고, 식사 일지를 쓰게 하고, 하루 네번 혈당 측정을 해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통화를 했다. 혈당은 열흘 만에 정상 가까이 떨어질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
만약 응급실에 갈 수도 있던 환자를 치료한 동네의사가 있다면 그는, ‘두 사람’을 치료한 셈이다. 그가 치료한 환자 그리고 그 환자가 응급실에 갔더라면 치료받지 못했을 또 다른 응급 환자. 지금은 그런 시기다.
문턱은 평등하지 않다. 높아진 응급실 문턱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은 따로 있다. 비용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비용에 민감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보다 더 많이 걸려 넘어진다. 지금 응급실 앞에 세워야 할 것은 문턱이 아니라 문지기다. 고지혈증을 잘 치료해 응급실로 올 뇌경색 환자를 예방하고 고혈압을 잘 조절해 응급실로 올 뇌출혈 환자를 줄일 수 있는 사람, 혈당이 천정부지로 올라가는 환자의 혈당을 잡아줄 그는 누구인가. 지금 이 시각에도 진료실에서, 집에서 환자를 만나는 동네의사다. 그러니 이 문지기는 응급실 문 앞에 있지 않다. 동네에 있다. 20년 가까이 동네의사를 해온 내 입장에서 정부의 필수의료 대책에 필요한 단 한 줄이 있다면 그건 ‘전 국민 주치의 제도’이다. 의사에 대한 선택권이 좁아지는 것에 거부감이 있어 ‘전 국민’이 어렵다면 애초에 선택권이 없는 농촌에서라도 마을 주치의 제도를 시행해야 한다.
평온한 저녁 시간. 뉴스 인터뷰에서 지인인, 응급의학과 의사를 봤다. 잠을 못 자 얼굴이 부어 있다. 그에게 미안했다. 오늘도 길 위에서 헤매고 있을 환자들을 생각하면 남의 일 같지 않다. 아직 재앙이 닥치지 않은 모든 이들의 마음이 그럴 것이다. 재앙에는 문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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