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때마다 소방수로…권오갑의 47년 롱런 비결 [안옥희의 CEO 리포트]

2024. 9. 12.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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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옥희의 CEO 리포트]

권오갑 HD현대 회장 약력 : 1951년생, 효성고, 한국외국어대 포루투갈어과, 1978년 현대중공업 입사, 2010년 현대오일뱅크 대표이사 사장, 2014년 현대중공업 대표이사 사장, 2016년 현대중공업 대표이사 부회장, 2019년 HD현대·한국조선해양 대표이사 회장, 2022년 HD현대그룹 대표이사 회장(현). 사진=HD현대



‘샐러리맨 신화’는 권오갑 HD현대그룹 회장을 대표하는 수식어다. 27세이던 1978년 말단 사원으로 입사해 41년 만인 2019년 그룹 총사령탑에 올랐다. 재직 기간만 47년에 달하는 정통 ‘HD현대맨’이다.

글로벌 불황으로 조선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던 2014년에 HD현대중공업 사장으로 취임해 고강도 개혁으로 2년 만에 흑자전환을 이뤄냈다. 2017년에는 지주사 체제로 전환해 투명한 지배구조를 구축했다.

회장 취임 후 조선·에너지·건설기계 3대 핵심 사업 포트폴리오를 완성했다. 창립 50주년이던 2022년 말 사명을 바꾸고 전통적인 제조업에서 첨단기술 기업으로의 전환을 이끌고 있다.

전문경영인인 그가 ‘월급쟁이 사장’의 한계를 뛰어넘은 비결로 ‘강력한 리더십’이 꼽힌다. 권 회장은 현대그룹을 창업한 정주영 명예회장 때부터 근무를 시작해 그간 영업, 구매, 수출입, 경영지원, 홍보, 법무 등 다양한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해왔다. 전문경영인으로서는 드물게 현대그룹 오너들을 연상케 하는 카리스마와 리더십을 두루 갖췄다는 평가다.



 

 불황 땐 3년간 무보수 경영

조선 불황 극복과 구조조정, 지주사 전환, 글로벌 R&D센터 설립과 사명 변경, 미래 먹거리 발굴 등을 순조롭게 이끌며 권 회장의 리더십은 여러 차례 증명됐다. 2014년 조선 업황 악화로 창립 이래 최대 규모 적자를 내며 위기에 빠진 HD현대중공업 사장으로 부임해 부활의 선봉장 역할을 해냈다.

노사갈등이 최고조일 때 부임한 그가 회사 정문과 구내식당에서 직원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호소문을 나눠준 일화는 유명하다. 호소문을 통해 추가 임금 인상이 없음을 알리며 회사 상황이 어려워진 것에 대해 경영진 잘못을 인정하고 회사가 정상화돼 이익을 많이 내면 그만큼 보상할 것이라며 파업 자제를 호소했다.

3500여 명의 인력을 감축하는 고강도 구조조정을 지휘하며 자신도 고통 분담에 동참해 “경영 정상화 전까지는 급여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실제 그는 HD현대중공업 사장 취임 두 달을 제외한 3년 4개월간 무보수로 일했다.

당시 HD현대중공업은 3조원의 적자를 내고 있었는데 권 회장이 이끄는 비상경영 및 구조조정을 통해 영업력과 재무구조가 빠르게 회복됐다. 2016년 1조6419억원의 영업이익을 내며 대규모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권오갑 HD현대 회장이 현대중공업 사장 시절인 2014년 9월 울산조선소 정문에서 출근하는 직원들과 악수하며 파업 자제를 호소하고 있다. 사진=HD현대중공업



 

 진정성 있는 통합 작업…노조, 무파업 선언

2010년에는 그룹에 편입된 HD현대오일뱅크 초대 사장으로 부임해 과감한 투자, 조직문화 혁신, 덕장 리더십을 바탕으로 1300억원에 불과했던 HD현대오일뱅크 영업이익을 4년 만에 1조원대로 키웠다. 재임 기간 HD현대오일뱅크의 철저한 체질 개선을 이끌어 동종 업계에서 3년 연속 영업이익률 1위를 달성하며 뛰어난 경영 능력을 발휘했다.

HD현대오일뱅크는 HD현대중공업이 1993년 정유업계 진출을 선언하며 극동정유를 인수해 현대정유로 이름을 바꿨다가 1999년 외환위기 당시 아랍에미리트의 국영 석유회사인 IPIC에 경영권을 매각했다. IPIC와의 오랜 소송 끝에 승소한 뒤 11년 만에 되찾은 회사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외국인 CEO의 진두지휘를 받아온 만큼 조직문화가 외국계 모회사의 영향으로 개인화돼 있었다. 또한 경영권 교체로 직원들 사기와 조직력이 바닥을 치고 있는 상태였다.

권 회장은 별도의 취임식 행사도 하지 않고 바로 공식 업무를 시작해 조직 내 패배의식과 느슨해진 조직 기강을 잡는 데 주력했다. 서울과 대산공장에 정주영 명예회장의 경영철학이 담긴 액자를 걸고 ‘현대정신’을 기업문화에 접목하려고 힘썼다. 권 회장은 2021년 두산인프라코어(현 HD현대인프라코어) 인수 직후에도 인천공장에 찾아가 ‘현대정신’ 액자를 선물한 바 있다.

권 회장은 바쁜 일이 있어도 매주 화요일 HD현대오일뱅크 대산공장으로 출근해 구내식당에서 직원들과 함께 식사하며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 스킨십 경영에 돌입했다. 매주 금요일에는 ‘경영진과의 대화’ 자리를 만들어 직원들과 소통했다. 최고의 회사가 되려면 끈끈한 조직문화 구축이 우선이라는 판단에서다.

권 회장은 “협력사 직원들도 우리의 소중한 동반자이자 가족”이라며 대산공장 내 입주해 있는 협력업체를 위한 전용 식당과 샤워시설, 쾌적한 사무공간 등이 구비된 ‘한마음관’을 만들었다. 협력업체 직원들이 그간 가설 건물이나 컨테이너 박스를 임시 사무실로 사용하며 변변한 샤워시설도 없어 불편을 겪어온 것을 알고 마련한 것이다.

권오갑 HD현대 회장이 현대중공업 사장 시절인 2014년 9월 울산조선소 정문에서 출근하는 직원들과 악수하며 파업 자제를 호소하고 있다. 사진=HD현대중공업



 

 ‘사장님 車’ 에쿠스, 직원들에 내줘

그는 사장 업무용 차량인 에쿠스를 직원들의 결혼, 장례식 등 경조사에 사용할 수 있도록 내주기도 했다. 당시 본사가 있던 서울 남대문로 연세빌딩 지하 4층 주차장에는 권 회장의 에쿠스가 항시 대기 상태로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차량을 제공할 땐 기사까지 딸려 보냈다.

HD현대오일뱅크 노조는 2011년 임금 결정을 사측에 위임하고 무파업을 선언했다. 노조가 임금협상을 사측에 위임한 것은 1988년 노조 창립 이후 처음이었다.

김태경 당시 HD현대오일뱅크 노조위원장은 “임금 위임과 무파업을 결정하기까지 쉽지는 않았지만 HD현대중공업 편입 이후 새로운 경영진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재계에선 권 회장의 덕장 리더십이 통했다고 보고 있다.

오너일가의 두터운 신임도 그만의 강력한 무기다. 1951년생으로 올해 74세인 권 회장은 여전히 그룹에서 오너의 의중을 가장 잘 헤아리는 복심으로 통한다. 47년간 오너일가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해온 만큼 신임이 두텁다.

창업주와 오너 2세이자 HD현대 최대주주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을 모두 보좌했으며 현재 오너 3세인 정기선 부회장의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1990년 학교법인 울산공업학원과 현대학원 사무국장으로 재직하며 정몽준 이사장의 비서 역할을 했다. 2004년 울산현대 호랑이축구단 단장을 맡았고 2007년에는 울산현대호랑이축구단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2009년 프로축구 울산현대축구단, 내셔널리그 울산현대미포조선축구단 등을 관리하는 현대중공업스포츠 대표도 맡았다. 2013년에는 한국프로축구연맹 총재를 맡아 K리그 발전을 이끌었다.

HD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사진=HD현대중공업



 

 조선·에너지·기계 3대축 ‘순항’…시총 증가율 1위

회장 취임 이후 조선·에너지·건설기계 등 3대 핵심축으로 이뤄진 사업 포트폴리오를 구축해 지속가능한 성장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 결과 HD현대그룹은 올해 자산 총액 기준 재계 8위로 한 계단 상승한데 이어 대기업집단 중 올해 상반기 상장사 시가총액 증가율 1위를 차지하며 파죽지세의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HD현대그룹 9개 상장계열사 시총은 연초 33조8192억원에서 7월 초 53조202억원으로 19조2010억원 증가했다. 조선업 수주 증가와 HD현대마린솔루션의 상장 효과, 인공지능(AI) 전력 관련주로 부상한 HD현대일렉트릭 등의 시총이 불어난 영향이다.

HD현대그룹 상장계열사의 시총(9월 4일 종가 기준)은 약 56조원으로 재계 6위다. 지난 5월에는 사상 처음으로 상장계열사 시가총액이 50조원을 넘어섰고 7월에는 64조원을 돌파, 포스코그룹을 제치고 재계 5위로 올라서기도 했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조선업 ‘슈퍼사이클’로 그룹 주축인 조선업의 수익성이 높아졌고 전력기계, 건설기계, 친환경 분야 등으로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해 안정적인 실적 흐름을 유지한 덕분이다.

경기도 판교 GRC에서 열린 HD현대 50주년 비전 선포식에서 HD현대 권오갑 회장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HD현대



 

 오너경영 기틀 닦아…정기선 대관식 과제

남은 과제는 ‘정기선 체제’를 안착시키는 일이다. HD현대그룹은 정몽준 이사장이 1988년 현대중공업 회장에서 물러나 정치 활동을 본격화한 뒤로 30년 넘게 전문경영인 체제를 유지해왔다. 정몽준 이사장의 장남인 정기선 부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서면서 30여 년 만에 오너경영 체제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정 부회장은 지난해 부회장으로 승진해 회장직까지 한 단계만을 남겨놓고 있다. 그룹 내 유일한 부회장 직함을 달며 2인자로 부상했다. 그룹을 대표하는 대외행보를 활발히 벌이며 차기 총수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지만 지배력은 아직 미미하다. 그룹 승계의 핵심인 지주사 HD현대 지분을 확보해 지배력을 확대해야 한다.

정 부회장은 최근 HD현대 주식을 적극적으로 사들이며 지분율을 늘리고 있다. 정 부회장의 지분율은 7월 기준 6.12%(483만7985주)로 정몽준 최대주주(26.6%), 국민연금에 이은 3대주주다.

재계 관계자는 “권오갑 회장이 지난해 연임에 성공해 2026년 3월까지가 임기인 만큼 그룹의 기초체력을 다지고 주요 사업의 경쟁력 확보와 AI 등 미래 사업 역량 강화에 힘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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