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신 당하기 전에 ETF 의결권 행사 똑바로”… 당국 압박에 운용사 진퇴양난
금감원 기준대로면 운용사 97%가 의결권 불성실 행사
계열사 영업 엮여 운용사 독자적 행동 어려워
금융당국이 자산운용사에 펀드를 통해 투자한 회사에 대한 의결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라고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에 이어 김병환 금융위원장까지 자산운용사에 의결권을 제대로 행사하라고 주문했다.
상장지수펀드(ETF) 시장을 키우고 있는 국내 자산운용업계는 고민이 깊어졌다. ETF에 담은 종목들에 대해서도 의결권을 행사하고 상세 내용을 공시해야 하는 부담이 생기면서다. 당장 금감원이 의결권 공시가 미흡한 자산운용사의 실명을 공개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운용사들은 은행이나 증권사 등 그룹 계열사 영업에 지장이 생길 수 있어 진퇴양난에 빠졌다.
12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금융당국은 주주 권익 침해 사례에 대한 펀드 의결권 행사 현황을 점검해 미흡 사례 실명 공개(Name&Shame·공개적 망신 주기)를 추진 중이다. ETF에도 예외를 두지 않기로 했다. 자산운용사가 ETF에 담긴 종목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거나, 행사했을 경우에도 그 이유를 충분히 알리지 않았다면 지적하겠다는 뜻이다.
자본시장법상 펀드가 한 종목을 100억원 이상 보유하거나, 펀드 자산 총액의 5% 이상 담았을 경우 자산운용사는 해당 종목 회사에 대한 의결권을 충실하게 행사하고 그 내용을 한국거래소에 공시해야 한다. 의결권 행사 내용은 물론 의결권 행사 관련 내부지침, 펀드별 소유 주식 수, 운용사와 의결권 행사 대상 법인과의 관계 등도 기재해야 한다.
지난달 금감원은 자산운용사의 의결권 행사 공시 미흡 사례를 공개했다. 운용사명은 공개하지 않았다. 성실 공시의 기준을 빡빡하게 잡다 보니 금감원 점검 대상이었던 274개사 중 96.7%인 265개사가 불성실 공시 자산운용사에 해당했다.
금감원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주주총회 안건에 찬성하면서 사유로 ‘특이사항 없음’을 기재하면 불성실 공시에 해당한다. 또 가진 지분율이 적어 사실상 주총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아도 미흡 사례에 해당한다.
안건별로 의결권 행사 관련 내부지침 등 행사 근거를 공시하지 않은 것도 문제로 지적됐다. 자산운용사는 투자자가 의결권 행사 여부의 적정성을 파악할 수 있도록 의결권 행사와 관련한 세부지침을 공시해야 한다. 금감원은 법규 나열 수준의 기본 정책만 공시해선 안 된다면서 각 안건에 따라 세부지침 중 의결권 행사의 근거가 되는 내용을 기재하라고 했다.
자산운용업계는 국내 주식형 ETF 대다수가 한 종목을 5% 이상 담고 있기 때문에 의결권 행사 내역을 상세히 공시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입장을 보였다.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한 전체 기업의 시가총액은 2100조원 수준인데, 이 중 시총 1위인 삼성전자가 약 20%(412조원)를 차지한다. 코스피 지수를 추종하는 ETF라도 특정 종목을 5% 이상 담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러니 반도체와 이차전지 등 특정 업종에 투자하는 테마형 ETF는 말할 것도 없다.
특히 상장사와 금융투자업계는 이해 관계가 촘촘히 얽혀 있어 자산운용사에 상당한 부담이 된다. K자산운용이 A상장사의 주총에서 지배주주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의결권을 행사하고 그 사유로 지배주주를 비판하는 내용을 공시했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A상장사는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때 K자산운용의 관계사인 K은행을 이용하지 않는 보복 행위를 할 가능성이 있다. 마찬가지로 기업공개(IPO)와 채권 발행 업무에서 A그룹이 K증권을 주관사로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금융지주 내 계열사의 영업 때문에 자유로운 의결권 행사가 어렵다는 불만은 지난달 이복현 금감원장과 자산운용사 최고경영자(CEO)의 간담회에서도 나왔다. 이에 대해 이 원장은 “외부 요인으로 인해 펀드의 독립적인 의결권 행사가 저해받지 않고 실질적인 의결권 행사가 이뤄질 수 있도록 개선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답한 바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뚜렷한 안은 나오지 않은 상태다.
일각에선 의결권 공시 대상을 줄여 자산운용사의 부담을 덜자는 주장도 나왔다. 펀드별로 볼 게 아니라 자산운용사의 전체 자산을 기준점으로 삼자는 얘기다. 현재는 100억짜리 ETF에 특정 종목을 5억원만 담아도 의결권 행사와 공시 대상이다. 하지만 전체 운용자산을 기준으로 했을 때 다른 펀드에서 편입하지 않았다면, 해당 종목은 비중이 크지 않아 의결권 공시 대상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이에 대해 금융당국 관계자는 “자산운용사의 전체 자산을 기준으로 삼는 방안은 법을 개정해야 가능하다”며 “법 개정까지는 시일이 걸리는 만큼 단기간에 실현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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