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플랫폼, 그 나라서 번 만큼 그 나라에 세금 내야”
유럽연합(EU) 최고법원이 지난 10일 아일랜드의 법인세 혜택과 관련해 애플에 130억유로(약 19조원)의 과징금을 부과한 판결의 근거는 빅테크의 ‘조세 회피’가 공정한 경쟁을 왜곡시킨다는 것이었다. 매출이 발생한 국가에서 수익에 합당한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은 ‘불법 지원(unlawful aid)’에 해당한다는 논리다. ‘조세 회피’로 비용을 줄여 경쟁사보다 유리한 입장에 놓인다는 것이 유럽사법재판소(ECJ)의 판단이다. 법인세율이 낮은 국가의 법인으로 수익을 몰아주는 수법으로 천문학적 세금을 피해 온 빅테크의 행태에 경종을 울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빅테크 기업들의 막무가내 행태에 재갈을 물리려는 경쟁 당국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ECJ의 판결 논리는 한국 매출을 싱가포르 법인 등으로 옮겨 법인세를 회피해 온 구글 등 국내 거대 플랫폼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조세 회피’로 아낀 비용이 유튜브 뮤직 같은 음원 서비스의 가격을 낮추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ECJ의 판결문 전문을 분석해 보면, ECJ는 “애플이 세금 혜택으로 아일랜드에서 세금을 내는 다른 기업보다 유리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 입증됐다”며 “유럽 내 경쟁을 왜곡하는 모든 형태의 지원은 불법이고, 세금 혜택도 마찬가지”라고 판단했다. 애플은 아일랜드에 ‘애플 오퍼레이션스 유럽(AOE)’이라는 자회사와 ‘애플 세일즈 인터내셔널(ASI)’라는 손자회사를 뒀다. 여기에 아이폰·맥북 등 제품과 앱스토어 같은 플랫폼 서비스의 생산·판매 권한을 위임해 북·남미를 제외한 전 세계의 수익을 몰아줬다. 그 수익은 자회사에 대부분 현금으로 남겨뒀다. 아일랜드는 이런 글로벌 기업의 현금 보유에 대해서 과세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애플이 2003~2014년 아일랜드에서 적용받은 법인세율은 0.005~1%에 불과했다. 아일랜드 자국 기업들의 법인세율 12.5%보다 현저히 낮다.
당초 1심인 EU의 일반 법원은 애플의 납세가 아일랜드 세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최종심인 ECJ는 여기에 ‘불공정 행위’라는 잣대를 적용해 애플에 과징금을 부과한 것이다.
ECJ 판결의 가장 큰 의미는 ‘조세 회피’를 세금의 문제가 아닌 ‘불공정 행위’라는 시각에서 접근했다는 것이다. 조세 제도는 나라마다 다르고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규제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불공정 행위’는 특정 국가의 법률이 아닌 글로벌 시장에서의 공정한 경쟁 여부로 판단할 수 있다. 특히 최근에는 독점 같은 불공정 행위에 대한 제재가 강화되는 추세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특정 국가에만 적용되는 세법 대신 공정 경쟁법을 활용한 EU 경쟁 당국의 전략적 승리”라고 전했다.
◇어디에도 세금 안 낸 꼼수
ECJ의 판결문에는 애플의 조세 회피 방법이 자세히 설명돼 있다. 애플은 아일랜드에 자회사와 손자회사를 두고 활용했다. 흔히 ‘더블 아이리시(double Irish)’라는 방식으로 빅테크들이 법인세율이 낮은 아일랜드를 통해 세금을 적게 내는 방식이다. 아일랜드에 자회사만 두면 미국 세법을 적용받지만, 자회사·손자회사 구조를 만들면 아일랜드 세법을 적용받는 아일랜드의 법률 시스템을 이용한 것이다. 아일랜드는 낮은 법인세를 앞세워 글로벌 빅테크를 유치하기 위해 이런 법체계를 만들었다.
애플의 수익은 두 단계를 거쳐 아일랜드의 법인으로 집중됐다. 우선 미국과 북·남미를 제외한 나머지 해외에서 애플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해서 얻은 수익은 손자회사인 ASI에 집중됐다. 이 돈은 로열티 명목으로 자회사인 AOE로 다시 건너갔다. AOE는 아일랜드에 있지만, ‘비거주 법인’이라는 특수한 지위를 인정받아 세금 혜택을 받는다. 특히 애플은 아일랜드 정부와 1991년·2007년에 조세 관련 협정을 맺고 대부분의 이익에 대해 최소한의 세금만 내기로 약속받았다. 이를 두고 EU 경쟁 당국은 “아일랜드 정부가 애플에 부당한 보조금을 지급했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이번에 ECJ가 EU 경쟁 당국의 손을 들어줬다.
ECJ는 판결문에서 “다양한 형태로 기업 예산에 포함되는 비용을 깎아주는 조치는 엄격한 의미에서 보조금은 아니지만, 성격이 유사하고 동일한 효과를 가지기 때문에 지원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ECJ는 또 “애플에 대한 감세로 아일랜드 내 다른 경쟁사들이 차별받지 않았는지 살펴야 한다”고 했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EU 당국이 회원국 정부가 애플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에 적용하는 법인세율과 관련해 추가적인 조사에 들어갈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회계 자문 업체 PKJ 리틀존의 이전가격(transfer pricing) 부문장 파르한 아짐은 “아일랜드에 유럽 허브를 설립함으로써 이익을 챙겨 온 다국적 기업들은 추가적인 조사에 직면할 것이라고 예상된다”고 말했다.
◇한국서 세금 회피하는 빅테크는?
한국에 진출해 있는 구글·넷플릭스 등 빅테크도 조세 회피 지적을 받는다. 구글은 주요 수입원인 앱 장터 수수료, 유튜브 광고 수익, 유튜브 프리미엄 멤버십 요금 등을 한국 법인인 구글코리아의 매출로 잡지 않는다. 한국 법인은 싱가포르 법인의 업무를 단순 대행하고, 서버도 싱가포르 등에 있다는 이유로 한국 매출의 대부분을 싱가포르 법인으로 이전한다. 구글코리아가 공시한 지난해 매출은 3653억원이지만, 최근 한국재무관리학회에서 발표된 보고서에선 최대 약 12조원으로 추산됐다. 넷플릭스는 한국 매출 대부분을 본사에 수수료로 지급하는데, 이를 비용 처리해 영업이익을 낮춰 그만큼 법인세를 절감한다.
이렇게 회피한 세금은 한국 내 영업에 활용될 수 있다. 유료 서비스인 유튜브 뮤직의 가격을 낮추거나 음원 확보 자금으로 투입할 수 있다. 실제 유튜브 뮤직은 유튜브 프리미엄 멤버십에 끼워 팔기로 들어가면서 국내 음원 서비스 업체인 ‘멜론’을 제치고 1위 사업자가 됐다. 온라인 서비스 업체 관계자는 “국내 업체들은 세금을 수백억 원, 수천억 원 내는데, 글로벌 플랫폼들은 30분의 1도 안 되는 세금만 낸다”며 “애초 경쟁이 안 된다”고 했다.
전성민 가천대 경영학과 교수는 “최근 미국과 중국이 자국 플랫폼을 앞세워 경제·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국가 플랫폼 자본주의’를 앞세우고 있는데, 유럽이 최근 디지털 시장법 같은 규제를 앞세워 제동을 걸고 나섰다”며 “우리도 유럽처럼 해외 플랫폼에 대응할 수 있는 국가적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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