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론/한상훈]‘알 권리 vs 피의사실공표죄’… 충돌 해소할 대안 찾자
법원이 유출금지 명하고 위반 땐 증거 배제
언론 자유 부담 안 되게 정교한 설계 필요
여론재판으로 큰 피해 땐 면소 판결도 방법
이러한 잘못된 습관에 대해 지난 수십 년간 여러 대안이 논의되었고, 일부 제도개혁도 있었으나 사실상 달라진 것이 없다. 프랑스 칸 영화제와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받은 영화 ‘기생충’ 등에 주연으로 출연했던 영화배우 이선균 씨가 마약 관련 수사를 받던 중 피의사실의 언론 보도와 공개 소환으로 작년 12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은 우리 사회에는 물론이고 국제적으로도 큰 충격을 주었다. 이 문제의 심각성으로 인하여 한국형사법학회 등 학회들도 피의사실 공표의 적극적 제도 개선을 정부와 국회에 건의하는 의견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2011년 형사소송법을 개정하여 수사기관의 피의사실공표죄에 대하여 법원이 기소를 명령할 수 있는 재정신청을 도입했을 때, 2014년 경찰·법무부 등이 수사 사건에서 공보에 관한 내부 규정을 정비했을 때 뭔가 바뀌지 않을까 기대하였으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2021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설립되면서 피의사실공표죄도 공수처의 수사대상이 되었을 때에도 단 한 번도 기소된 적이 없어 모두 사실상 무용지물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외국에서 한번 대안을 찾아보자. 영국의 경우, 법정모욕죄법(Contempt of Court Act 1981)은 피의자가 소환된 시점 또는 구속영장이 발부된 시점부터 형사 절차가 진행 중인 재판에 상당한 편견을 줄 심각한 위험이 있는 범죄보도, 방송, 언급, 문서 등을 처벌하고 있다. 법원은 보도, 방송, 언급 등의 금지를 명령할 수 있으며 이를 위반하면 법정모욕죄가 성립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에도 배심재판 전에 언론 보도가 과도한 경우, 공정한 배심원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침해되었다고 보아 유죄 평결을 파기하고 재심을 결정하기도 한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판에서 알 수 있듯이 법원이 수사기관, 피고인 등에게 발언금지명령(gag order)을 내리고, 명령 위반 시 처벌할 수 있다.
이를 참고하여 몇 가지 해결책을 제안해 본다. 첫째, 사후적 처벌의 틀에서 벗어나 사전에 절차적, 예방적으로 공표 피해를 막을 장치가 필요하다. 즉 피의자 등에게 법원에 공표, 유출 금지를 청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여야 한다. 현재 피의사실공표죄가 실효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국민의 알 권리, 언론의 자유와 충돌하는 지점에서 사후적으로 수사기관의 공표, 브리핑에 대하여 형벌을 부과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법원이 공표 피해자의 신청을 받아 수사기관의 공표, 유출 금지를 사전에 명하고, 이를 위반하면 처벌하는 구조를 신설해야 한다.
둘째, 피의사실 유출자의 처벌을 위해서는 언론사나 기자를 수사해야 하는데, 이것은 언론 자유 측면에서 부담이 될 수 있으므로 법원의 명령을 위반하면 해당 사실의 증거능력을 부정하여 법정에 제출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미국에서 판례법으로 발전하여 선진국에 확산된 ‘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을 피의사실 유출, 공표에 적용하자는 것이다.
셋째, 피의사실이나 피고사실의 공개가 반복적으로 또는 중대하게 행해진 경우 사후 구제책이 필요하다. 이미 여론재판으로 피의자, 피고인이 형벌에 준하는 피해를 받았다고 보일 경우, 소송 절차를 종결짓는 면소 판결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마치 공소시효 제도가 국가기관의 태만, 증거 멸실에 따른 실체적 진실 발견의 어려움, 장기 도피 등으로 인한 피고인의 고통을 고려한 것과 유사한 이유다.
피의사실공표죄는 1953년 제정형법 때 신설된 것으로 과거 의용형법(구 일본제국의 형법)에는 없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혼란스러웠던 정국 속에서 경찰 등 수사기관이 여론전을 통해 선거에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신설된 것인데, 이제 그런 문제는 공직선거법에 맡겨야 한다. 피의사실공표죄는 공정한 재판을 보장하고 수사기관의 망신 주기, 치적 홍보, 자백 압박 등 잘못된 수사 관행을 근절하기 위한 제도로 거듭나야 할 때다.
한상훈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한국형사법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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