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제자 가운데 진리를 깨달은 이는

한겨레 2024. 9. 11.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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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를 떠나려 하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 누가 우리들의 우두머리가 될까요?” 예수는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어디에 있든지, 의인 야고보에게 가라. 하늘과 땅에 관계되는 모든 것이 그의 영역이다.”(도마복음 12)

제자들은 예수를 메시아로서 그들의 욕망을 구현해주는 자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을 떠나려고 한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제자들 중에 천국 열쇠를 받은 베드로를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끈 지도자로 알고 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그를 초대교황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공식 후계자로 조직체를 이끌자는 베드로가 아니라 진리(참나)를 깨달은 야고보라고 말씀하신다. 의인 야고보는 ‘하늘과 땅 모두가 하나다’라고 하는 진리를 자각하였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같이 ‘하나가 된 자’는 ‘내 속에 거하는 분별심’(ego)을 제거하고, 영원한 천국의 길인 내면의 진리(참나)를 자각한 자이다. 이 세상은 오직 꿈과 그림자이며, ‘오직 진리만이 실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자는 아집(我執), 법집(法執)이 사라졌으므로 그 어디에도 자기 자신(참나)이 아닌 곳이 없다. 그는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삼라만상과 하나가 된 것이다(만물여아일체·萬物與我一體, 장자).

천지 우주와 하나가 된 야고보처럼 ‘분별을 초월한 존귀한 자’(참나)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거듭남을 체험하고, 주관과 객관을 나누는 이원성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예수는 ‘너희도 처음(근본)부터 나(참나)와 함께 있었다’(요한복음 15:27)고, 장자(莊子)는 “하늘과 땅이 나와 함께 생겨났다”고 하였다. 모두 ‘나’(ego)라는 존재가 성립되고 나면 곧 바로 ‘너’라는 존재가 성립되며 이어서 우주 만물이 각각 성립된다고 하여(제법무아·諸法無我) ‘하나의 생명’(참나)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야고보처럼 근본인 하나(One)가 되는 ‘하나님의 자리’는 ‘최상의 행복이 넘치는 천국이 지금 이 자리에 이미 임해 있음’을 자각하는 경지이며, 분별을 벗어나 본래의 마음(참나)을 직관하는 깨달음이다(견성성불·見性成佛). 깨달음의 방법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편 46:10)의 성경 말씀대로 무욕(無慾)으로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 육체가 곧 ‘나’라고 하는 생각(거짓 나)을 소멸하면, 저절로 참나(하나님)를 알게 된다.

하나의 우주 생명인 하나님(참나)은 마음이 동(動)하면 가려져 사라지고, 분별하는 몸과 마음의 ‘나’(거짓 나)가 소멸되어졌을 때, 즉 고요할 때 나타난다. 허상인 이원성(ego)의 집착을 버릴 때 실상인 하나님(One)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요한 명상을 통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게 되며(이사야 30:15), 자아의 근원(One)을 파고드는 탐구를 통해서 마음이 내면(참나)으로 향해지면, 나쁜 습관인 이원성의 원습(原習)들은 저절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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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라고, 불경(佛經)은 ‘모양이 있는 것은 꿈과 같고, 환상, 물거품, 그림자와 같으며 텅 비어 있다고 한다(금강경). 현대물리학은 ‘물질은 에너지의 파동이며, 천지우주에는 에너지로 충만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현상은 허상으로 텅 빈 공(空)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허공 가운데 가득 차 있는 신비한 신성(불성)은 생명(참나)이며, 영원한 진리이다(진공묘유·眞空妙有).

하늘과 땅에 관계되는 모든 것은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의 생명이다(All is One). 고통을 일으키는 이원적 사유(ego)의 소멸은 육체적 예수가 아니라 하나인 예수의 생명(신성)을 자각함으로써, 또한 육체적 부처가 아니라 하나인 부처의 생명(불성)을 자각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예수(부처)의 생명이란 바로 누구나 가지고 있는 참나(신성, 불성)이다. 성경의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예수)가 있느니라’(요한복음 8:58)와 불경(佛經)의 ‘당신이 태어나기 이전의 당신의 진면목(부처)을 보라’는 진리는 하나의 생명(참나)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천지우주에는 예수(부처)의 생명이 충만하다(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 자기 안에도 영원한 예수의 생명(참나)이 이미 실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원적 대상으로 있는 육신의 예수를 믿어야만 비로소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 우리는 예수의 간절한 기도대로 모든 존재들과 근본적으로 하나(One)임을 자각하여야 한다(요한복음 17:21). 분별하는 에고가 사라진 이 자리(One)를 만수르(Mansur)는 ‘고통과 슬픔, 죽음이 없는 영원한 희열의 나라이다’라고 하였다. 구원은 의인 야고보처럼 자기를 비우고, 하늘과 땅에 관계되는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천국의 경지이다. 기독교의 아가페적 사랑은 나 자신을 비우는 무아(無我)와 하나의 생명을 통해서 나타난다.

구자만 박사(개신교 장로·신흥지앤티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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