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에게 이상적인 제주서 새 학문 공동체에 보탬”
“그동안 모래주머니를 달고 사는 느낌이었는데 비로소 자유로운 학문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게 됐어요. 자유로운 학자로 새롭게 출발합니다.”
내년 2월 19년 간 몸담았던 전남대 철학과에서 정년퇴직을 앞둔 김상봉 교수는 지난달 말 거처를 광주광역시에서 제주도 제주시 한림읍으로 옮겼다. 퇴직까지 아직 몇 달이 남았지만 이번 학기는 강의를 하지 않는 연구학기여서 사실상 교수 생활이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난 2일 제주 자택에서 만난 김 교수는 “이제 비로소 비본래적인 일에 신경쓰지 않고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며 “서울에서 ‘거리의 철학자’로 살던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독일 마인츠 대학에서 서양고전문헌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이마누엘 칸트 철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그리스도신학대학교 종교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중 1998년 학내 문제로 해직됐다. 그러나 해직 이후에도 민예총 문예아카데미에서 철학 강의를 이어가는 한편 학벌 문제 등 사회 비판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며 ‘거리의 철학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제주에서 뇌과학과 우주론 공부에 집중할 계획이라는 그는 “본래 형이상학은 자연학 다음에 오는 것”이라면서 “현대 자연과학의 성과와 비판적으로 대결하는 작업을 한 뒤 형이상학으로 다시 건너가려 한다”고 설명했다.
눈앞의 과제는 칸트의 ‘3대 비판서’(<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를 번역하는 일이다. 오는 25일부터는 매주 수요일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순수이성비판> 강의도 진행한다.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평생교육원)은 올해 칸트 탄생 300주년을 기념해 칸트 강독 강의를 마련하고 김 교수를 초빙했다. 평생교육원은 향후 철학 강좌를 늘리고 고등학생을 위한 철학캠프를 여는 방안도 구상하고 있다.
김 교수가 공부를 위해 제주를 처음으로 찾은 것은 연구년이었던 2012년 여름이다. 당시 1년을 머물고 그 뒤로도 꾸준히 제주를 찾으면서 그는 제주가 철학자에게 이상적인 장소라고 생각하게 됐다. 우선 바다로 격리돼 있어 내면으로 침잠하기에 유리하다. 한국 사회의 모든 모순들이 첨예하게 집약된 곳이라는 점도 철학하기에는 좋은 조건이다. “철학자가 공리공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선 현실과 예민하게 접촉하고 있어야 하는데, 제주는 4.3으로 대표되는 분단의 모순과 오늘날의 영혼 없는 자본주의의 폐해가 육지보다 첨예하게 노정되는 곳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 시대를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서울이나 광주에서보다 훨씬 더 아프게 고민하게 됩니다.”
김 교수는 평생교육원이 칸트 강의를 개설한 것은 ‘더는 이런 식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제주도민들의 위기 의식이 반영된 일이라고 해석했다. 관광 부흥만으로는 제주도의 미래를 찾을 수 없다는 위기 의식이 다른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20명 정원인 김 교수의 칸트 강의에는 정원의 두 배가 넘는 인원이 신청했다. 제주시 인구의 3분의 1도 안 되는 서귀포시에서, 그것도 평일 저녁에 <순수이성비판>을 읽는 강의가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신선한 충격이라고 그는 말했다.
바다로 격리돼 침잠하기 좋고 분단 모순 등 첨예하게 집약돼
‘시대 치유’ 훨씬 아프게 고민, 25일부터는 칸트 강독 강의도
뇌과학·우주론 공부 집중하며 칸트 ‘3대 비판서’ 번역에 노력
김 교수는 활발한 외부 활동으로 ‘폴리페서 아니냐’는 눈총을 받기도 했지만 학계에서 인정받는 학자들을 여러 명 길러냈다. 이는 그의 커다란 자부심이다. 그럼에도 김 교수는 “지금의 대학에는 철학이 설 자리가 없다”고 단언했다. 국내 대학이 저술 작업의 가치를 저평가하고 있다는 게 단적이 증거다. 오는 11월 출간되는 김 교수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은 2019년 1월부터 지난해 8월까지 집필에만 4년 반이 걸린 책이다. 원고지로 1만1000매에 이르는 대작이어서 1000쪽짜리 단행본 2권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원고지 1만1000매짜리 책을 내도 교수 실적 평가 점수는 250점에 불과합니다. 원래는 300점이었는데 배점이 줄었어요. 반면 원고지 100매짜리 논문을 등재학술지에 실으면 100~150점을 받습니다. 공대에서는 이런 논문을 해마다 40~50편씩 씁니다. 요즘 총장들은 의대 아니면 공대 출신이에요. 인문학자들이 어떻게 공부하고 논문을 쓰는지에 대해 이해가 없는 사람들이 대학의 주인이 되고 있는 겁니다. 이제 더는 철학이 대학 안에서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순수 학문연구 공동체로서 대학의 수명은 한국에선 끝났어요.”
대학 바깥에서 새로운 연구교육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는 “제주에서 이루고 싶은 개인적인 소망은 훌륭한 학자가 되는 것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새 학문 공동체의 문을 여는 데 기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최근 논란이 된 뉴라이트 학자들의 식민지 근대화론과 관련해선 “주체성이 없기 때문에 자꾸만 자기 존재의 근거를 타자에게서 구하려 하고, 그래야만 심리적 안정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비판했다.
“일본이 (일제 시대에) 철도를 깔았습니다.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베트남은 프랑스인들이 들여온 알파벳을 쓰고 있어요. 그렇다고 베트남인들이 프랑스에 고마워해야 하나요? 우리가 쓰는 학문적 개념어들은 대부분 일본인들이 서구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철도는 우리가 새로 놓을 수 있지만, 학문 언어는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일본인들에게 감지덕지하거나 자학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김 교수는 2016년 7월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내년에 정상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발언은 이듬해 3월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탄핵을 예견한 것 아니냐는 평가를 받으며 화제가 됐다. 김 교수는 최근 정치권 일각에서 대통령 탄핵론이 제기되는 것과 관련해 “또다시 대통령을 탄핵하는 건 시민사회의 분열을 심화시킬 뿐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서 “여당과 야당이 싸울 때는 싸우더라도 타협할 건 타협하는, 본래적 의미의 정당정치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현실 정치에 대한 김 교수의 관심은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을 벗어나 있다. 그는 지난 2월 출간된 <영성 없는 진보>에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면서, 이는 나와 세계가 하나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전체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정신이 진보진영에서조차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한국 사회가 정신적 파탄을 겪을 수밖에 없는 건 우리의 철학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념이 하나의 네이션(민족)을 만드는 것이지 김치를 같이 먹는다고 네이션이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저와 같은 철학자가 제몫을 하지 못한 책임이 큽니다.”
제주 |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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