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지금도 남아 있는 우리 동네 명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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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동아일보에 연재됐던 경성(京城) 10개 동(洞)·정(町)의 '내 동리 명물(名物)'에 소개되었던 100개 명물 중 아직도 건재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100년 전 명물은 무엇일까.
100년 전에도 명물이었던 '행촌동 은행나무'다.
아직도 서울에 남아 있는 100년 전 명물을 찾아 당시의 그 많은 사연들을 한번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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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소개한 서울 명물찾아 가을여행 탑골공원, 본래 원각사 있었던 한양 명소 500년 가까이 자리지킨 행촌동 은행나무 사직단, 토지·곡식神 모시고 제사 지낸 곳
100년전 동아일보에 연재됐던 경성(京城) 10개 동(洞)·정(町)의 '내 동리 명물(名物)'에 소개되었던 100개 명물 중 아직도 건재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100년 전 명물은 무엇일까. 서울에 남아 있는 100년 전 명물을 찾아 가을 여행을 떠나본다.
먼저 종로에 있는 탑골공원을 찾아가보자. "명물 명물하니 서울 안 명물에 탑골공원 납석탑이야 뺄 수가 있습니까. 이 탑은 고려 충렬왕비인 원(元)나라 공주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으나 그 반대로 우리 조선에서 만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탑을 원각사탑이라고 하는 것은 세조대왕 9년에 이 탑골에 원각사라는 절을 지었었던 까닭이랍니다. 원각사는 중종대왕 때 헐어서 반정공신(反正功臣)들의 집을 짓고 탑만 오늘날까지 그 자리에 남아 있답니다. 아니 원각사비도 남아 있습니다. 이 탑의 위 3층을 내려 놓은 것은 임진왜란에 왜병이 가져 가려고 내려 놓았다가 무거워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전하는 말이니까 꼭 믿을 수는 없습니다." (1924년 8월 15일자 동아일보)
다음은 사직동(社稷洞)에 있는 사직단(社稷壇)이다. "우리 조선 태조께서 즉위하신 이듬 해에 도읍을 한양에 정하시고 또 그 이듬 해에 사직(社稷)을 세우고 춘추(春秋)로 제향(祭享)을 지내게 하셨답니다. 이 사직이 있는 까닭에 동리(洞里) 이름을 오늘날까지도 사직골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사직은 단(壇)이 둘인데 주위(主位)로는 각각 석주(石柱)를 모셨습니다. 동편에 있는 것이 사(社)라는 것이니 후토씨(后土氏)로 배위(配位)를 삼고 서편에 있는 것이 직(稷)이라는 것이니 후직씨(后稷氏)로 배위를 삼았답니다. 각 고을에 잇는 사직단에는 석주도 없고 배위도 없습니다. 이 사직의 역사로는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하니까 재미없는 것이나마 하나 적어 보겠습니다. 선조(宣祖) 때 가을 제향을 지내려고 관원이 들어가 보니, 후직씨 위패가 없어졌더랍니다. 갑자기 찾을 수도 없고 만들 수도 없어서 허위(虛位)에 제향을 지낸 뒤에 여러 가지 수단을 다 부려서 찾아보니 위패가 사직단 근처 어느 나무 밑에 묻혔더랍니다. 채근(採根)해 본 결과 수복이(조선 시대 묘(廟)·사(社)·능(陵)·원(園)·서원(書院) 따위의 청소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아치)가 사직서(社稷署) 관원을 모함하려고 훔쳐다 묻은 것을 알고 그 수복이를 대역률(大逆律)로 죽였답니다. 이야기는 싱겁지만 그만입니다." (1924년 7월 28일자 동아일보)
사직단을 나와 행촌동(杏村洞) 꼭대기에 오르면 동네 이름인 행촌동의 주인 격인 420살 먹은 은행나무가 살고 있다. 100년 전에도 명물이었던 '행촌동 은행나무'다. "사직골 성터지 넘어 남향 언덕 위에 은행나무 하나가 우뚝 서 있습니다. 맑은 바람이 불 때마다 가지와 잎사귀는 속살속살 옛날 이야기를 하는 듯 합니다. 이 은행나무는 행촌동의 명물이요 행촌동의 이름은 이 은행나무가 있는 까닭이 올시다. 이 은행나무의 춘추는 얼마나 되었는지 자세히 아는 이가 없으나 노인네의 전하는 말을 들으면 사직(社稷) 안에 있는 태조대왕 수식송(手植松)과 벗할 나이 아니면 연치(年齒) 존장(尊長)은 단단하다 합니다. 그리고 물구즉신(物久則神)이라더니, 나잇날이 많아서 아는 일이 있는지 보통 해에는 열매가 열리지 않다가 나라에 큰일이 있으려면 한 번씩 열린다는 말도 있답니다. 몇 해 전까지는 엉클 한 뿌럭지를 드러내어 오고 가는 사람을 붙들어 앉히고 구름 같은 그늘로 덮어주며 '내가 너희들 몇 대 조(祖)부터 이렇게 정답게 굴었다'하는 듯하더니, 지금은 코 큰 양반의 울타리 속에 들어가서 예전 인연을 다 끊어버리고 '어느 몹쓸 놈이 나를 팔아 먹었노'하고 궂은 비를 눈물삼아 뿌리고 있습니다." (1924년 7월 14일자 동아일보)
이 은행나무 아래에는 권율(權慄) 장군(1537-1599)의 집터가 있고 은행나무를 두고 양쪽에 두 붉은 벽돌집이 있다. 은행나무를 지나 현저동으로 내려오면 독립문(獨立門)이 있고 그 위쪽에 서대문 형무소가 있다.
우선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가 본다. "현저동에는 다른 동리에 별로 없는 '형무소'(刑務所)라는 무서운 명물이 있습니다. 형무소라는 말은 시체(時體) 말이요 예전 이름으로 '감옥소'(監獄所)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무엇이 불행하니 무엇이 불행하니 한들 형무소 안에서 고생하는 사람들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네들도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야 나도 한번 세상에 나아가서 복(福)있고 팔자 좋게 떵떵거리고 살아보려고 나왔겠지요마는, 어찌어찌 하다가 그만 그렇게 자기 몸 하나 마음대로 가지지 못하게 되고 굳게 닫힌 쇠문 높이 쌓은 벽돌담 속에서 눈물과 한숨으로 세상을 보낸답니다. 세상 사람으로 태어나기는 일반이었건만 어떤 사람은 팔자 좋아 고량진미(膏粱珍味)에 싫증이 나서 자동차 타고 산보 다니고, 어떤 사람은 먹고 입을 것이 없어 목구멍이 원수라 마음을 잠깐 이상히 먹고 무엇을 어쨌다가는 감옥소 콩밥에 머리가 세게 됩니다 그려. 세상은 밤낮 경찰서니 감옥소니 하는 살풍경한 세상이니 말하면 무엇합니까. 언제나 한번 세상이 화평해져서 경찰서니 감옥소니 하는 무서운 물건이 없어질는지요?" (1924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
서대문 형무소를 나와 서울역 쪽을 바라보면 바로 보이는 것이 독립문(獨立門)이다. "교북동 큰 길가에 독립문이 있습니다. 모양으로만 보면 불란서 파리에 있는 개선문(凱旋門)과 비슷합니다. 이 문은 독립협회가 일어났을 때 서재필(徐載弼)이란 이가 주창하여 세우게 된 것이랍니다. 그 위에 새겨있는 '독립문'이란 세 글자는 이완용(李完用)이가 쓴 것이랍니다. 이완용이라는 다른 이완용이가 아니라 조선 귀족 영수 후작 각하올시다. 연전(年前) 3.1운동 때 독립문 위에 태극기가 뚜렷이 솟아나서 경찰서에서 씻어버리려고 '폼푸'질까지 한 일이 있습니다. 사람의 손으로는 그리지 못할 곳이라 도깨비 짓이라고 그 당시 떠들었습니다." (1924년 7월 15일자 동아일보)
아직도 서울에 남아 있는 100년 전 명물을 찾아 당시의 그 많은 사연들을 한번 들어보자. 그 가슴 아픈 사연들이 이제는 모두 사라진 옛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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