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율곡의 방대한 평전 나온다면 얼마나 신날까요”

강성만 기자 2024. 9. 11.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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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주자 평전’ 이어 ‘양명 평전’ 옮긴 김태완 전남대 특별연구원

최근 수징난 ‘양명 평전’을 번역한 김태완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특별연구원. 김태완 연구원 제공

“저도 학자로서 제 연구를 하고 싶었지만 막상 연구를 해보니 기초 토대가 되는 텍스트가 매우 부족했어요. 그래서 스스로 새로운 학설을 만들어낼 깜냥이 되지 못한다면 다른 학자들이 원활하게 연구할 수 있는 바탕과 토대를 마련해주자는 생각으로 주자학, 양명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이 두 텍스트를 필생의 숙명, 사명으로 여기고 번역했어요.”

2015년 ‘주자 평전’(수징난 저·역사비평사)을 번역해 한국출판문화상 번역상을 받았던 김태완(60)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특별연구원이 이번에는 같은 저자의 책 ‘양명 평전’을 우리말로 옮겼다. 그가 꼬박 5년 걸려 번역한 ‘주자 평전’은 200자 원고지 만매 분량으로 책으로는 상·하권 합쳐 2400쪽이다. 역시 번역에 5년 이상 걸린 ‘양명 평전’(역사비평사)은 상·중·하 3권에 2900쪽 가까이 된다. 200자 원고지로는 1만2천매다. 그가 10년 세월을 2천쪽이 넘는 거질의 두 평전 번역에 바친 덕에 한국 독자들은 동양철학의 거성이자 한국철학에도 큰 영향을 끼친 주희(1130~1200)와 양명(1472~1528)의 삶과 사상을 좀더 입체적으로 살필 수 있게 되었다.

“두 평전은 중국에서도 주희와 왕양명의 학문 생애를 완벽하게 복원한 전대미문의 학문적 업적으로 인정받고 있어요. 특히 원서가 1992년에 나온 ‘주희 평전’은 중국에서 국가 규모의 여러 상을 받았고 이 나라 학자들도 해당 분야 연구에서 일차적으로 참조하는 텍스트입니다.” 지난 2일 이메일로 만난 김 연구원의 설명이다.

숭실대 철학과에서 율곡의 실리사상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김 연구원은 2018년에 율곡의 대표저술 ‘성학집요’와 ‘주희 평전’ 번역 등의 업적으로 율곡연구원이 주는 율곡학술대상을 받았다.

‘양명 평전’

신유학의 개창자인 주희의 사상은 조선 사회에서 실질적으로 지배 이데올로기 역할을 했지만 ‘주희 평전’이 나오기 전 국내 출판계에는 일본 학자가 쓴 간략한 전기만 존재했다. 하늘이 내려준 본성이 아니라 개체의 마음이 바로 하늘이라는 통찰로 주자학적 사유에 맞선 왕양명도 그간 국내에서 상세하고 방대한 전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왕양명 사상인 양명학은 퇴계 이황 등 주자 신봉자의 배척으로 조선 사회에 정치사상으로 착근하지 못했지만 개체의 자유와 주체성 그리고 실천을 중시하는 사상적 특성에 많은 유학자들이 이끌렸다. 병자호란 당시 주화파를 이끈 최명길, 영조 때의 학자 하곡 정제두 그리고 다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한말 강화도의 강화학파 유학자들이 대표적이다.

‘양명 평전’ 한국어판을 보지 못하고 지난 5월22일 별세한 수징난(1945~2024) 전 저장대 교수는 이 평전 저술에 20년 세월이 걸렸다고 후기에 썼다. 10여년 동안 왕양명에 대한 2만여종의 고적을 조사·열람·고증하고 이어 10여년을 집필에 힘을 쏟았다.

“위대한 사상, 예술과 같은 문화적 분야를 연구하려면 먼저 그 문화적 업적을 쌓은 위인의 구체적인 삶을 꼼꼼하게 봐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시대의 자식이니 그가 살았던 시대, 그의 생활세계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알아야 그의 문화적 업적을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어요.” 인물 공부와 그 인물의 사상을 아는 게 어떻게 관련되느냐는 물음에 대한 김 연구원의 답이다.

실제 평전은 양명의 방대한 문집은 물론 양명이 직간접적으로 교류한 인사들의 문집에 나오는, 전해지지 않았던 양명의 사유 흔적까지 샅샅이 훑어 양명의 행적과 그의 심학사상이 형성되어 발전한 역정을 탐색했다. 양명이 친족 등 주변인에게 무척 자상했고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점을 쳤다거나 권력의 비위를 거슬려서 ‘오랑캐 땅’의 미관말직으로 쫓겨났을 때 가지 않으려고 투신자살한 것처럼 위장했다는 등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도 풍부하다.

위당 정인보(1893~?)는 ‘양명학 원론’에서 “(조선 시대에) 양명학은 그 책이 책상 위에 놓인 것만 들켜도 사문난적이라는 비난을 각오해야 했다”고 적었다. 도대체 왕양명의 사유가 어떻길래? “성리학에서 본성이란 객관적 이치가 개체에 선천적으로 내재하는 것으로서 그 개체가 그 개체다움을 실현하는 근거라고 해요. 그런데 왕양명은 본성도 마음 안에 들어 있고 마음이야말로 모든 사람의 가장 본질이기 때문에 마음의 본래 모습에 이치가 들어 있고 마음이 곧 이치를 깨닫는다고 했어요. 이 논리라면 내가 없으면 세계도 없는 것이죠. 내가 세계를 판단하고 이 세계에서 내가 주체로서 세계와 관련을 맺는 것이지요. 그러자면 내가 참다운 내 마음을 늘 들여다보고 확인하고 마음을 올바르게 써야겠지요.”

5월 별세한 중국 학자 수징난 저술
두 평전 5300쪽 번역에 10년 바쳐
수징난 20년 걸려 양명 평전 집필
“문헌 2만종 참고한 전대미문 업적
한국철학 연구 토대 쌓으려 번역”

주자 평전 번역으로 한국출판문화상
“논문과 비슷한 값으로 평가받는데
몇년 걸리는 번역에 누가 매달릴까”

그는 “농담반 진담반”을 전제로 “양명 사상이 수용되었다면 조선이 더 일찍 무너졌을 수도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개인의 주체성과 인권을 기반으로 한 ‘민주사회의 학습’이 충실하게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개인의 자유와 주체성을 용인하고 나아가 이런 경향이 극단으로 치달리면 조선 사회는 아마 외부 침입 없이도 붕괴했을 겁니다.” 덧붙였다. “중국은 워낙 대륙이고 인구가 많아 공식 이념이나 주류 이론에 저항하는 대항 이론이 나와도 서로가 자기 영역을 지키거나 또는 서로 갈등을 일으켜 충돌하더라도 패배한 쪽에서 일단 물러나 권토중래를 꿈꿀 수 있는 여지가 있었어요. 그러기에 다양한 학설이 나와 각축했어요.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이르면 통일신라 후기, 늦어도 고려 중기부터는 구심력이 강하게 작용해 다양한 학설을 허용할 수도 없었고 우리 문화적 유전인자 속에는 강력한 중심 지향의 힘이 작용해 정통성을 중시했어요.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구조가 형성된 현대사회에도 여전히 우리는 이념지향이 강합니다.”

두 평전을 번역하며 가장 크게 배운 게 뭘까? “수징난 교수가 학문 연구를 위해 꼼꼼한 준비와 각고면려하는 모습을 본 게 가장 큰 보람입니다. 어떤 분야를 공부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토대의 연구입니다. 누군가는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연구업적을 자랑하고 또 대부분 사람이 이런 업적을 칭송하지만 실은 이런 연구의 토대가 되는 일을 하는, 이름이나 빛도 없이 애쓰는 사람들의 헌신은 외면 받습니다. 수 교수의 일생은 바로 이러한 학문연구의 토대를 쌓는 일이었어요. 평생 자기사명을 철저히 수행한 삶 자체가 커다란 교훈이었죠.”

김태완 연구원. 김태완 연구원 제공

한국의 대학이나 학술 환경에서는 20년 걸려 평전을 쓰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하자 그는 “중국의 사정을 잘 알 수 없어 말씀드릴 수 없다”면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 환경에서 이런 업적이 나오지 않는 것은 거의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언젠가부터 대학의 교수나 연구자들은 실적이 지원의 중요한 검증 기준이 되었는데요. 문제는 실적 평가에 논문과 번역서는 거의 비슷한 평가를 받는다는 점입니다. 몇 주나 한두 달에 걸쳐 쓴 논문과 수년 걸려 작업한 번역서가 거의 비슷한 값으로 평가받는다면 누가 번역에 매달릴까요? 해마다 논문 쓴 실적으로 연구비를 받고 또 교수 채용공고에 응모해 임용될 수 있는데 누가 몇 년 걸려 번역을 하려 들겠습니까?”

두 평전 번역의 어려움을 묻는 질문에는 “주희보다 양명 평전이 더 까다로왔다”고 답했다. “주희 평전은 우리나라 학문이 주자학을 위주로 발전해온 만큼 그런대로 용어든 문체든 이해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행정가이자 장군이면서 사상가였던 양명 평전은 명대의 공문서 텍스트가 많아 공문서 특유의 양식이나 용어가 익숙하지 않았어요. 그게 가장 어려웠어요. 왕양명의 시도 전고가 많아 번역하기 쉽지 않았어요. 시는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아 언제나 어려워요.”

김 연구원은 ‘성학집요’ 외에 율곡의 책문을 연구, 해설한 ‘율곡문답’, 율곡과 고봉 기대승의 경연 텍스트를 발췌하여 번역, 해설한 ‘경연, 왕의 공부’, 율곡의 문집을 발췌 번역한 ‘율곡집’ 등을 펴낸 율곡 전문 연구자이다. 율곡의 정신이나 사상 중 우리 시대에 꼭 되새겼으면 하는 점을 물었다. “현실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마주하여 해결하려는 정신입니다. 이런 정신을 현실적으로 적용하려는 사상을 무실(務實)이라고 합니다만, 율곡은 조선시대 학자들 가운데 특히 실(實)을 강조하고 많이 말하였습니다. 학자라 하여 공허한 관념을 희롱하는 게 아니라 실은 현실에 발을 딛고 날카로운 눈으로 현실을 보고 이상을 꿈꾸는 것입니다.”

‘주자 평전’

주희와 양명 두 유학자의 방대한 전기를 번역한 사람으로서 김 연구원은 이런 바람도 나타냈다. “두 평전이 우리 사회에 던져준 과제는 이제 우리에게도 우리 문화사의 위인에 관해 이토록 상세하고 방대한 전기나 평전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에 관해, 두 평전만큼이나 상세하고 방대한 전기가 나온다면 얼마나 신이 날까요! 더 나아가 동서양 위대한 인물의 신뢰할 만한 전기를 우리나라 사람이 저술할 수 있는 단계까지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경북 봉화 출신인 그는 2010년 학부모로 광주광역시 철학·인문학 대안학교인 지혜학교와 인연을 맺은 게 계기가 되어 지금껏 광주에서 독립 연구자의 길을 걷고 있다. 2012년부터 6년 동안 지혜학교 부설 철학교육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영남 출신으로서 호남에서의 삶이 어떻냐고 하자 이런 답이 나왔다. “호남에서는 제 삶의 뿌리인 영남과 다른 문화적 차이를 아주 크게 느낄 수 있어요. 산천과 풍광이 아주 다르고, 삶의 문화도 달라서 새로운 세계를 살아가는 느낌입니다. 또 호남을 타자의 시선으로 볼 수 있어서 호남 연고의 인사들과 교류할 때 서로의 의식세계를 확장해가는 데 도움이 됩니다. 호남 사람들과 영남 내륙의 답사여행을 자주 하는데 이 여행이 또한 호남 사람들에게는 문화적 차이를 느끼게 하고 나아가 타자의 문화를 통해 자기 문화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듯합니다. 호남이 저를 품어주었기에 제 학문생애에서 결정적인 일을 여기서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점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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