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련되고 매끈한 프랑스식 ‘판소리’···‘5·18정신’과 저항성은 묻혀

이영경 기자 2024. 9. 11.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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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비엔날레 30주년
유럽의 ‘스타 큐레이터’
니콜라 부리오 예술감독
판소리를 ‘공공장소의 소리’로 해석
기후위기 시대, 인간·비인간 공존 다뤄
정체성·지역성은 희미해
과도한 파빌리온 지적도
제15회 광주비엔날레에 전시된 마르게리트 위모의 ‘*휘젖다’ 전시 전경. 연합뉴스

세련되고 매끈한 프랑스식 ‘판소리’.

올해로 30주년을 맞은 광주비엔날레는 유럽의 ‘스타 큐레이터’ 니콜라 부리오를 예술감독으로 내세우며 ‘판소리’를 주제로 택해 많은 궁금증과 기대를 낳았다. 세련되고 감각적인 공간 연출은 호평을 받았으나, 광주비엔날레의 출발점이었던 ‘5·18 광주정신’과 판소리가 상징하는 기층민중의 저항성과 삶의 핍진성은 프랑스식 세련됨에 묻혀 잘 드러나지 않았다.

제15회 광주비엔날레가 ‘판소리: 모두의 울림’을 주제로 지난 6일 개막식을 갖고 86일간 전시의 시작을 알렸다. 부리오는 한국의 전통의 판소리를 ‘판(space)+소리(sound)’, 즉 ‘공공장소에서 나는 소리’라고 해석했다. 21세기 지구 공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존재와 소리를 30개국 72명의 작가가 참여하는 전시로 풀어냈다.

부리오는 “팬데믹 시기를 거치며 공간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여성·성소수자·이주민에게 허용되는 사회적 장소는 제한돼 있고, 기후변화는 공간의 사용방식을 크게 바꾸고 있다”며 “예술은 인간과 기계, 동물, 유기적 생명체가 공유하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전시엔 인종차별·전쟁 등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는 작품들과 함께 미생물·기계·자연 등 비인간 존재와의 관계와 공존을 다룬 작품들을 선보인다. 부리오를 유명하게 한 ‘관계의 미학’이 인간 중심적인 것이었다면, 관계의 범위가 지구상의 생물·비생물 전체로 확장된 것이다.

지난 6일 광주 북구 용봉동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에서 니콜라 부리오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이 비엔날레 주제인 ‘판소리: 모두의 울림’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련되고 웅장한 공간 연출

‘공간’과 ‘소리’를 내세운 만큼, 대형 설치작품을 전시장 곳곳에 적절히 배치한 세련되고 웅장한 공간 연출과 각각의 작품에서 울려 퍼지는 사운드의 겹침이 인상적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혼잡한 도시의 소음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나이지리아의 도시 라고스 거리의 소리를 이용해 만든 에메카 오보그의 ‘Oju 2.0’이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소음을 들으며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면 쓰레기장에서 10년은 묵은 듯 흙먼지를 뒤집어쓴 폐기물을 연상시키는 피터 부겐후트의 설치작품 ‘맹인을 인도하는 맹인’이 황폐한 풍경을 연출한다. 네타 라우퍼는 가자지구와 함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경계에 있는 서안지구 국경 장벽이 환경과 생태에 미친 영향을 탐구하는 영상 작품 ‘25피트’ 등을 선보인다. 1·2관은 ‘부딪침 소리’를 다룬 곳으로 밀집되고 포화된 동시에 서로 분절되어 존재하는 공간을 느낄 수 있다.

제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에 전시된 필립 자흐의 ‘부드러운 폐허’ 전시 전경. 연합뉴스
제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에 전시된 맥스 후퍼 슈나이더의 ‘용해의 들판’ 전시 전경. 이영경 기자
인간·동물·기계 비인간 존재와 공존하는 세계

이야기의 기승전결 구조처럼 뒤로 갈수록 고조되는 전시관의 분위기는 3·4관에서 절정을 맞이한다. 3관 ‘겹침 소리’는 기계에서 동물에 이르는 비인간 존재들과의 관계를 생태적 시선으로 바라본 작품들이 배치됐다. 필립 자흐의 천장에서 아래로 드리워진 대형 천과 고치 모양의 설치 작품 ‘부드러운 폐허’를 시작으로 운석의 분화구 같은 연못에 가득 찬 검은 물, 초록색 물이 솟구치는 분수, 폐기물과 식물 등이 한데 뒤섞여 혼종적이면서도 아포칼립스적 풍경을 연출한 맥스 후퍼 슈나이더의 ‘용해의 들판’으로 끝을 맺는다.

4관은 전시의 하이라이트, 극의 절정과 같다. 하얀 소금 사막과 식물 등 몽환적 풍경에 의자와 같은 일상적 물건을 함께 배치한 공간으로 관람객을 초대하는 비앙카 봉디의 ‘길고 어두운 헤엄’ 뒤로 선사시대 동굴벽화를 연상시키는 도미니크 놀스의 대형 회화가 배치됐다. 마르게리트 위모의 ‘*휘젓다’는 생명의 태초를 표현한 영적이고 시원적인 공간을 연출한다. 행성과 같은 유리구슬 가운데 천으로 만든 사람 모양의 형상과 제단이 설치됐다. 그릇엔 남조세균과 광합성 미생물이 담겨 태초의 생태계를 담았다. 작품을 배경으로 이날치 밴드의 전 멤버 송희가 참여한 판소리가 울려 퍼진다. ‘처음 소리’를 테마로 우주 생명의 태초를 신비롭고 웅장한 분위기의 공간으로 연출한 4관에 이어 분자 단위의 미시적 세계를 표현한 5관으로 전시를 끝낸다.

제15회 광주비엔날레에 전시된 소피야 스키단의 ‘아직 제대로 어우러지지 못한 기묘함을 뭐라고 부르지?’ 전시 전경. 광주비엔날레 제공
30주년 맞은 광주비엔날레의 ‘광주정신’과 지역성은 희미

기후변화, 인류세 시대에 인간과 동물·기계·미생물 등 다양한 존재들이 부딪치고 공존하는 미래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세련된 배치로 풀어냈다. 매끈하게 흘러가는 전시지만, 30주년을 맞은 광주비엔날레의 정체성과 지역성이 잘 느껴지지 않는 점은 아쉽다. 부리오는 “판소리는 목소리가 없는 사람들의 소리이며 지역성 있는 주제인 동시에 보편적·세계적 주제”라고 말했지만 한국의 광주가 아닌 다른 곳에서 열렸어도 무방했을 전시다.

기층 민중의 저항성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은 2관 입구에 있는 노엘 W 앤더슨의 작품이 눈에 띈다. 그는 ‘소울의 왕’이라 불리는 제임스 브라운의 노래 ‘플리즈 플리즈 플리즈’에 판소리와 북소리를 결합한 사운드트랙을 만들었다. 소울 특유의 음색과 판소리의 추임새를 뒤섞었다. 원곡의 ‘나를 사랑해 달라’는 구애의 목소리는 경찰에게 자신을 살려달라는 흑인의 절박한 호소로 변한다. 그는 천장에서 드리운 대형 태피스트리 작품 ‘빛이 보이나요?’ 등을 선보였는데, 태피스트리는 흑인 노예 노동으로 만들어진 면화를 상징하며, ‘플리-즈, 플리즈, 플리-이즈’는 백인 경찰에게 폭행당하는 흑인 이미지를 기반으로 만들었다.

지난 6일 제15회 광주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는 전시장에서 노엘 W 앤더슨이 자신의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영경 기자
광주 양림동 한부철갤러리에 전시된 안젤라 블록의 ‘다이내믹 스테레오 드로잉 머신’ 전시 모습. 광주비엔날레 제공

본전시관 이외에 양림동 8곳에 전시를 마련했다. 한부철갤러리에서 음악에 반응하는 기계가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는 안젤라 블록의 ‘다이내믹 스테레오 드로잉 머신’ 등 골목 사이사이에 숨어 있는 작품들을 만나는 재미가 있다.

한편 광주비엔날레는 31개의 외부 파빌리온을 꾸렸다. 지난해 9개에서 크게 증가한 것으로 미국, 캐나다, 독일, 일본, 싱가포르 등 22개 국가관과 9개의 도시·기관 파빌리온이 선보인다. 광주비엔날레는 외부 파빌리온 참여가 “역대 최대규모”라고 홍보했지만, 본전시와 무관한 파빌리온만 늘려 ‘물량 공세’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이스라엘 문화기관인 CDA홀론 전시를 두고 문화예술 단체가 보이콧에 나서기도 했다. ‘팔레스타인 문화연대’(KCAP)는 “광주비엔날레 재단이 전범국 이스라엘의 문화기관 전시를 용인했다”라고 비판하면서 CDA 홀론 파빌리온의 모든 전시와 프로그램을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한편 지난 4월 개막한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이스라엘 국가관은 반대 여론에 부딪혀 문을 열지 않았다.

광주 |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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