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 부결은 ‘궁정 쿠데타’였나 [남종영의 인간의 그늘에서]
남종영 |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 객원연구위원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종교 재판에서 어쩔 수 없이 천동설을 인정하고 나오면서 읊조렸다는 말이다. 한 시대의 지배적인 과학 지식이 새로운 지식에 대해 얼마나 저항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지난달 말 부산에서 과학계 최대 학술 행사인 세계지질과학총회가 열렸다. 원래 이 행사에서는 새로운 지질시대인 인류세가 비준, 선포될 예정이었다.
인류세는 인류의 영향으로 지구의 물리·화학적 시스템이 바뀌어 지구가 기존 지질시대인 홀로세의 평형에서 벗어났다는 주장이다. 2000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파울 크뤼천이 인류세를 제기한 뒤, 지질학계는 2009년 인류세실무단을 꾸려 이를 공식 지질연대표에 넣을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인류세실무단은 10년 넘는 연구 끝에 캐나다 크로퍼드 호수를 인류세 국제표준층서구역(GSSP)으로 제시하며, 인류세는 1952년 시작됐으며 이때부터 급증한 인공방사성물질이 증거라고 밝혔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지난 3월 국제층서위원회 투표에 앞서 실시된 제4기층서소위원회 투표에서부터 12대4로 부결되고 말았다.
“인류세 부결 과정에 대해 아주 할 말이 많습니다.” 부산에서 만난 마틴 헤드 캐나다 브록대 교수의 말이다. 그는 인류세 공인 여부를 투표한 제4기층서소위원회의 부위원장이었다. 부결된 지 여섯달 가까이 흘렀는데도 과학자들은 화가 가라앉지 않은 듯했다. 이틀 동안의 인류세 세션에서 한 과학자는 인류세 실무단이 제안한 안을 설명하며 주먹으로 연단을 꽝 치기도 했다. 다른 과학자는 아예 ‘인류세 회의론?’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과학계에서 사이비 취급을 받는 ‘기후변화 회의론’과 ‘부정론’을 빗대 인류세 반대론자를 맹공한 것이다. “과학을 오용해 기후변화 회의론을 지지한 활동을 파헤친 ‘애그노톨로지’(agnotology)를 통해 인류세 회의론을 개념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애그노톨로지는 특정 주제에 대한 의심과 무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연구하는 학문이다.
헤드 교수는 자신이 인류세 실무단으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얀 잘라시에비치 위원장과 함께 진행에서 배제됐고, 다른 부위원장이 진행을 맡으면서 투표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고 말했다. 일반적인 학계에서라면 진행자가 학술 문건에 대한 토론을 유도하고 제안자가 문건을 수정하는 절차를 밟는다. 인류세 투표는 그런 과정 없이 곧장 나아간 게 문제였다. 지난 4월에는 이를 ‘궁정 쿠데타’에 비유한 한 과학자의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 부산에서 만난 인류세 연구자들은 “국제층서위원회가 투표 결과를 인정한다고 성명을 냈는데, 왜 부결이 됐는지 과학적인 문건 하나 나오지 않았다. 이게 정상인가?”라고 되물었다.
그런데, 왜 다수가 반대표를 던졌을까? 헤드 교수는 “충분한 과학적 토론이 없는 상황에서 이데올로기가 투표의 가장 큰 지배 요인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지질시대를 연구하는 전통적인 층서학자는 최소 수천년에서 수억년의 시간을 다룬다. 고작 72년 전에 새로운 지질시대가 시작됐다고 하는 인류세 주창론자들이 고요한 지질시대의 추상화를 그려온 이들에게는 침입자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박범순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장은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 전환을 연상하게 한다”고 말했다. 당대의 과학 지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실이 축적된다. 이를 설명하는 새로운 이론이 떠오르지만, 기존의 과학 공동체는 이에 저항한다. 임계점에 이르고, 패러다임이 전환된다.
전통적인 과학자들은 ‘고정된 것으로서 자연’을 전제하고 멀리서 팔짱 끼고 관찰하는 방법론을 미덕으로 여겼다. 인류세에서는 이러한 패러다임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 인류가 자연을 쥐고 흔드는 압도적인 행위자가 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세를 헤쳐 나가려면 과학은 자연을 움직이는 인간을 동시에 연구해야 하고 인문사회과학과도 협력해야 한다.
운석 충돌이나 핵전쟁이 나지 않는 한 인류는 지구의 물리·화학적 시스템을 움직이는 행위자로 남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잘 보여주는 개념은 인류세 말고는 없다. 새로운 과학적 관점은 언제나 오래된 관점을 흔들어 저항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세상은 변했다. 오래된 관점의 저항은 이어지겠지만 그래도 인류세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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