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기념도서관’을 위하여 [크리틱]

한겨레 2024. 9. 11.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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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웠던 여름의 끝자락을 한 권의 책과 함께 보냈다.

최인훈의 대표작 '광장', '회색인', '화두' 등에는 책, 도서관, 서점에 대한 서늘한 문장과 절박한 마음이 곳곳에 넘실거린다.

이렇게 보면 전국 곳곳에 산재한 문학관보다는 기념도서관이라는 형식이 최인훈 작가의 삶과 결에 한층 부합되지 싶다.

최인훈기념도서관은 그 명칭만으로도 꼭 가고픈 열망을 풍기는 특별한 공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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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최인훈 작가. 한겨레 자료사진

권성우 | 숙명여대 교수·문학평론가

무더웠던 여름의 끝자락을 한 권의 책과 함께 보냈다. 그러다가 “낮에는 한여름 기온에 가까워도, 저녁나절에는 바람이 숲을 지나가면서 햇살의 흔적을 빠짐없이 지워간다”는 적실한 문장을 만났다. 마치 지금 이 시기를 묘사하는 듯한 아름다운 표현이다. 8년 전에 번역 출간된 마쓰이에 마사시의 장편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 이 문장이 등장한다. 어떤 작품은 왜 지금에야 이 책을 읽게 되었는가 하는 차원의 회한과 아쉬움을 불러일으킨다. 바로 이 작품이 그러했다. 독특한 문학적 품격을 지닌 이 매력적인 작품은 여러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지만 내게는 책과 도서관에 대한 절절한 찬가로 다가왔다.

작품에서 국립현대도서관 설계 공모에 참여하게 된 ‘무라이 건축사무소’의 구성원들은 단지 도서관 설계 입찰을 따내기 위한 과정에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책이 없는 상태에서도 책장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 아래 우아하고 멋진 도서관을 만들기 위해 갖가지 아이디어를 구상한다. 책장, 책, 열람실, 서고, 독서대, 열람실 의자, 도서관 콘셉트와 동선 등 도서관을 둘러싼 주제에 대해 숙고하고 토론하는 것이 이들의 일상이자 업무다. 이 과정에서 미적인 척도와 도서관 이용자들이 “즐겁게 책을 고르게 하는 것”이 이들의 도서관 설계 프로젝트 전반에 걸쳐 세심하게 고려된다. 책을 사랑하는 건축가들의 열정,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자연과 사물, 새와 식물에 대한 섬세한 관찰은 이 작품을 접하는 각별한 재미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는 “책을 읽는 것은 고독하면서 고독하지 않은 거야” 같은 마음을 관통하는 문장이 가득하다. 무엇보다 훌륭한 번역이 뒷받침되었기에 이 작품이 품은 문학적 향기를 독자들이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이리라.

이 소설의 여운은 이제는 고인이 된 최인훈 작가(1934~2018)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6년 전 여름 그가 세상을 뜬 이후에 ‘최인훈기념도서관’을 만들자는 주장이 제출된 바 있다. 최인훈은 단순히 한국의 대표적 작가로 기억되기에는 아쉬울 정도로 그만의 우뚝한 매력과 깊은 지성을 지닌 작가였다. 동시에 그는 누구보다 책과 도서관, 서점을 사랑했던 작가였다. 최인훈의 대표작 ‘광장’, ‘회색인’, ‘화두’ 등에는 책, 도서관, 서점에 대한 서늘한 문장과 절박한 마음이 곳곳에 넘실거린다.

이렇게 보면 전국 곳곳에 산재한 문학관보다는 기념도서관이라는 형식이 최인훈 작가의 삶과 결에 한층 부합되지 싶다. 2018년 말에 ‘최인훈기념도서관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이 주제로 토론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최인훈 작가가 인생 말년의 20여 년을 보낸 고양시에서는 최인훈기념도서관 건립을 긍정적으로 모색하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2022년 고양시장이 바뀌면서 도서관 건립은 백지상태가 됐다. 생각해 보면 최인훈의 문학은 시대의 야만에 대한 가장 지적인 대응이었다.

최인훈기념도서관은 그 명칭만으로도 꼭 가고픈 열망을 풍기는 특별한 공간이 될 것이다. 최인훈의 이름을 딴 도서관 건립은 정치적 입장에 따라 세울지 말지가 규정되는 그런 편협한 성격을 가뿐히 뛰어넘는 숭고한 프로젝트다. 그건 한국현대지성(문학)의 한 우뚝한 개성이 쌓아 올린 귀한 결실을 어떻게 기억하느냐를 가늠하는 시금석에 해당한다. 작가의 10주기에는 ‘광장’의 이명준을 생각하며 최인훈기념도서관 뜰을 천천히 산책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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